진수빈:...... 저기. (몸 살짝 네 쪽으로 기울여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오한설:(소리 듣고 고개 돌린다. 의아한 표정으로 눈 끔뻑인다.) 응, 무슨 일인데 그렇게 작게 불러?
진수빈:(짧게 주저한다.) 새로 전학 온 거지? 다들 널 아는 눈친데, 나만 따로 소개를 못 들은 것 같아서. (그러고는 시선이 명찰 쪽으로 향했다.) 이름이 뭐야?
오한설:(멀뚱 쳐다보다가 웃음 터뜨리며 수빈 어깨에 이마 쿵 찧고 허리 바로세운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래. 진수빈, 곧 기말고사라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봐. 만우절은 한참 지났거든?
진수빈:(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모습 얌전히 지켜보기나. 입만 뻐끔거리다 제 가슴께를 한 번 콕, 네 쪽을 한 번 가리키고 묻는다.) ...... 우리 아는 사이야?
오한설:갑자기 무슨 연기를 이렇게 실감나게 한대. (눈 동그랗게 뜨고 끔뻑인다.) …아님 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진수빈: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아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으니, 우리 만남은 지금이 처음임에 틀림없는데. 고민이 길다. 적당히 말을 맞춰주는 편이 낫겠지 싶다. 어색하게 웃었다.) ...한설아. 우리 안 지 얼마나 됐었지?
오한설:(고민하는 동안 턱 괴고 얌전히 기다리다 답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봤으니까, (손가락 접어가며 센다.) 10년쯤 됐나. 왜, 새삼 신기해서 그래?
진수빈:10년이나? (생각보다 큰 숫자가 들리자 입에서 큰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이 아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분명 어제까지 공석이었는데,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책상 아래 자리하던 팔 들어 턱 괴는 척 하며 제 볼 살짝 꼬집어 본다.) 으응, 새삼스럽게... (...꿈은 아닌데. 자연스레 꼬집었던 곳 문지르고 마찬가지로 바른 자세로 앉는다. 또 흘끗.) 나 더위라도 먹었나 봐. 상태가 영 별로네.
오한설:확실히 그래 보인다. (머리 팍팍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 다녀오면서 음료수라도 사다줄게.
진수빈:...... 그래? (하나같이 기억에 없는 일들이니 어떻게 반응해 주어야 할 지가 참 난감하다.) 맛있었다니 다행이지만. 내일은 조금 더 든든하게 먹어. 늦잠 잔 거야?
오한설:나 너보다 먼저 와있었는데? 원래 적게 먹는 거 알잖아. (웃으며 말하다 다시금 손 내민다.) …안 잡아줄 거야? 평소엔 먼저 잡았으면서. 진수빈 너, 오늘따라 이상해….
진수빈:그, 그랬나... 미안, 나 오늘 정신이 너무 없어서. (내민 손 살짝 그러잡는다. 짧게 눈치 봤다.) 기분 상한 거 아니지?
오한설:설마. 이 정도로 쉽게 기분 상했다면 네 가장 친한 친구 자리 못가졌어. 내가 얼마나 너를 잘 아는데. (이따금씩 걸음이 절뚝거린다.) 아무리 정신 없어도 내 이름 정돈 알 거 아냐. 그렇지?
진수빈:......얼마나 잘 아는데? (옆을 스친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절뚝거리는 걸음을 눈여겨 봤다. 꼭 처음 보는 양. 그러다 그 눈길이 네게 어색하게 느껴질 찰나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며 고개를 든다.) 응, 오한설. 한설아, 아까 모르는 체 장난쳐서 미안해.
오한설:이것저것 다 알고있지, 네가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충분히 알아. (티나게 시선이 닿으면 의미심장한 웃음소리 흘린다.) 이름만 알면 됐어. 래도 명색이 친구인데 어떻게 불러야할지 헤매지만 않으면 되잖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봐. 중간고사에서 등수 떨어졌댔지. 그래서 그래?
진수빈:(들리는 이야기에 잠깐 말이 없다.) 아마도. 그래도 아주 충격적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 몸이 받아들이는 건 또 달랐나 봐... (제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너, 그리고 그런 너를 알고 있는 모두들. 이 세상에 이질적인 게 오롯이 저 하나 뿐인 기분이 들었다. 한숨 폭 쉰다. 붙잡은 손이나 가볍게 흔들어 본다.) 아이스크림 먹으면 뭐든 나아질 것 같아. 얼른 가자.
오한설:그럴 수 있지. 스트레스란 게 그렇더라. (어쩐지 그뒤론 크게 걱정도 않고 대수롭지 않단 듯 일상적인 이야기나 늘어놓는다.) 시험 끝나면 바다 보러 갈까. 얼마 멀리 있지도 않지만… 고등학생 되고 나선 통 못 봤잖아. (느리게 걷다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와 건넨다.) 좋아하는 거 와삭바 맞지?
진수빈:미안, 내가...... 시계를 잘못 봐서. (숨 고르며 머리 탈탈 턴다. 촌스러운 꼴에 촌스러운 변명 멘트. 부산스럽게도 도착했다.) 늦는 줄 알았어. 많이 기다린 거야?
오한설:괜찮아, 나도 아까 왔어. (웃으며 말하곤 부스스한 머리 본다. 가까이 붙어 머리 정리해주고 떨어진다.) 신발 제대로 신어.
진수빈:(그 손길 얌전히 받는다. 지어 보이는 웃음이 어색하긴 하나 싫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차, 신발...... (주섬주섬 몸 굽혀 신발도 제대로 쏙. 고개는 버젓이 앞을 향하는데 자꾸만 힐끔거리는 시선이 네게 닿는다.) 나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 진짜로... (또 흘끔.) 어, 어디부터 갈까?
오한설:(흘끔대는 시선이 너무 티나서 웃고 만다.) 괜찮아. 귀여워. (자연스레 손 가져다 잡고 괜히 두리번거린다.) 내가 알아온 건 분위기 좋은 카페 정도인데. 하고 싶은 거 있어?
진수빈:(책장 관리를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안타깝게 바라보다 조심스레 책의 2챕터를 펴 본다. 어떤 내용이 있지?)
:2챕터 <녹색 눈의 남자>
고대부터 근대까지 수많은 지방에서 구전된 어떤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내는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기록마다 항상 비슷한 특징으로 묘사되었는데, 본래 파편처럼 흩어진 목격담이라 당연히 전부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여겨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 졸업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모으던 캐나다의 고고학 박사과정생들이, 비슷한 특징을 가진 인물에 대해 기술한 사료들이 시대도 지역도 다른 곳에서 어떤 패턴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연결성을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발견자들이 이 남성에게 주목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기원전 4세기경 황하의 기록입니다.
:2036년 황허 강 유역에서 새로운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발굴된 사료 중 ‘금색 머리, 녹색 눈, 흰 피부를 지닌 다른 인종의 사내’에 대해 언급한 유물이 있었습니다.
당대 황하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코카소이드적 특징으로 묘사된 남성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기록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사료가 너무나 부족하여 자세한 조사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전승된 기록 중 비슷한 남성이 등장한 다음 시기는 작성년도 110년대로 추정되는 로마인의 편지글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외양의 서양인 남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후로도 이 남성은 수 차례 전세계의 기록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후대로 내려와 사료의 양이 풍부해질수록, 동일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지언정 최소한 비슷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는 문장의 개수가 늘어났습니다.
유럽 권역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는 외모가 아닌 탓에 특이한 일화가 보이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그가 역사에서 가장 길게 자취를 감추었던 4세기부터 9세기 사이 영국과 로마, 프랑스 기록에서 네 차례 보였던 ‘녹색 눈을 가진 남자’가 바로 이 남성이 아닐지 증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책 속의 문장이 한참 시선을 끈다. 불로불사의 존재라는 건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르지. 기록 속 환상에 하나 의구심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건 어릴 적부터 고수한 사고방식의 연장선이다. 흥미롭다. 꼭 제 친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묘사 하며, 곧장 돌아 서서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를 적이면 어느새 책을 닫아 원 자리에 돌려놓고 있다.)
오한설:다 봤어? 책을 너무 열심히 읽길래. (방금까지 들고있던 책이 뭘까 하고 두리번거린다.)
진수빈:아, 으응. ...여기 처음 보는 이야기가 나와서. (멋쩍게 웃으며 방금 꽂아 넣은 책 검지로 덜컹거려 본다.) 녹색 눈의 남자라고 하는데. 한설아, 들어본 적 있어?
오한설:(수빈이 이야기하는 중에 다시 한 번 두리번. 그리고 건드린 책 본다. 세계야담집?) …녹색 눈의 남자? 글쎄. 나도 눈이 초록색이긴 한데. (웃으며 자기 눈 가리킨다.)
진수빈:...역시 처음 듣는구나. (눈 가리키는 양 보곤 작게 웃는다. 손 끝에 묻은 먼지 털어내곤 완전히 네 편을 바라보고 선다.) 나중에 한 번 찾아 봐. 아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역사 속에 등장한 사람인데, 묘사가 꼭 널 닮았거든. (순차적인 설명에 따라 시선이 네 이곳저곳을 옮겨 간다.) 매혹적인 금색 머리칼, 밝은 색 피부결, 진한 녹빛 눈동자, 인상도 날카롭댔고, 키도 180 즈음이랬어. (길게 읊어내곤 숨 크게 들이켰다.) 신기하지?
오한설:(눈 끔뻑이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다 그냥 즐겁게 웃는다.) 그러게, 얘기만 들으면 정말 나랑 닮았네. …좀 흔한 특징들인 것 같기는 하지만. 당장 외국 나가면 그렇게 생긴 사람이 널렸을걸. (수빈 볼 쓱쓱 문지른다. 서점 내부 마지막으로 둘러보곤 손 잡아 이끈다.) 사고 싶은 거 없으면 카페 가서 쉬자.
진수빈:그치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엔 네가 유일해서... (어물거리다 순순히 끄덕인다. 이끌려 발을 뗐다.) 무슨 대본집 샀는지 물어봐도 돼?
오한설:학교 원어민 선생님도 있고. 하긴, 그분은 부드럽게 생기셨네. (성함이… 세르지오였지? 덧붙였다.) 요즘 유명한 판타지 드라마 있잖아. 넌 티비 잘 안 봐서 모르려나? (유독 네게 붙어서 길 정 중앙을 따라 절뚝대며 걷는다.)
진수빈:...... (덧붙이는 말엔 대꾸 못 하고 끄덕인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 속에서 세르지오 선생님 모습도 한 번 떠올려 보고.) 응, 미안. 물어본 건 난데 어차피 들어도 잘 모르네. (민망한 듯 웃었다.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오한설:(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으면, 카운터로 가서 젠 몫의 카라멜마끼아또와 제 몫의 아메리카노 주문해 가져온다.) 전부 커피로 시켰는데. 혹시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해.
진수빈:아니, 난 커피도 좋아. (네가 신경써서 골라준 거니까. 낯간지러운 말은 입 안으로 삼키고 밝게 미소 짓는다.) 배고프진 않아? 저기 케이크도 많던데.
오한설:…먹고 싶어? 사줄게. 어떤 케이크? (테이블에 트레이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다시 지갑 꺼낸다.)
진수빈:... 바, 바닐라 크렘브륄레. (들어오는 길에 메뉴 훑고 온 모양. 술술 답하더니 시간 두고 퍼뜩 일어난다.) 그냥 내가 사 올게. 한설이 넌?
오한설:(멀뚱) 그런 건 또 언제 봤대. (일어나려는 동시에 어깨 눌러 앉힌다.) 됐어, 앉아있어. 난 네 거 좀 뺏어 먹을래. (카운터로 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자, 바닐나 크렘브륄레.
진수빈:(절절한 감동과 미안함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거 비싼 건데. (빠아안.) 너부터 먹어...
오한설:괜찮아. 나 돈 많아. (수빈에게 포크 쥐여주고 빨대로 아메리카노 쫍 빨아먹는다. 그러다 다시 구석 흘끔…)
진수빈:............ (기어이 한 입 크기만큼 잘라 네 입 앞에 들이민다.)
오한설:(구석에서 시선을 떼면 코앞에 케이크가 있다. 눈 크게 떴다가 웃는다.) …케이크를 먹여주게, 네가 내 남자친구야? (그렇게 말하고는 잘도 받아먹는다.)
진수빈:...어? 그, 그렇게 보일 수도 있나? 친구끼리도 얼마든지... (횡설수설 하다 카라멜 마끼아또 몇 모금 마시며 시선 슬슬 피한다.) ...맛있어?
오한설:(케이크는 맛있고 앞에 앉은 사람은 귀엽고. 즐겁지 않을 수 없어서 습관보단 환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있다. 그런 반응 즐기듯 빤히 보다가도 두리번대며 주변을 살핀다. 빨대 아랫입술에 걸쳐놓고 대답한다.) 응, 맛있다. 너도 얼른 먹어봐.
진수빈:(큼지막하게 조각내서 냠. 입에 넣는다. 분위기는 쉽게 전염 된다고들 하지. 환히 웃는 모습 보고 있으면 제 입꼬리도 자연히 올라가게 되더라. 두 입 째 먹고 나서야 네 시선이 가는 방향을 알아챈다.) 으음, 화장실 찾는 거야?
오한설:아, (바로 고개 돌려 마주본다.) …아니, 너랑 이렇게 어디 놀러온 것도 오랜만이라 그냥 좀 설레서. 미안해…. 신경쓰였어? (뒤로 기댔던 허리 펴고 의자 끌어 테이블에 가까이 앉는다. 그러면서도 잠깐씩 구석으로 향하는 짧은 시선을 숨길 순 없었다.) 케이크 맛있지? 남으면 포장해서 가져가면 되겠다. 할아버지는 케이크 드셔?
진수빈:아냐, 못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잘못 짚었네. (들려오는 이야기에 갈피를 못 잡던 눈은 얼마 있지 않아 케이크에 고정, 한참 열심히 먹기만 한다. 이어 작은 목소리로.) 한설아. 나도 너랑 오랜만에 놀러와서 설레고 기분 좋아. 알고 있지? (실은 학교 밖 너와 함께하는 이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말 맞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히 배 채우고 나면 포크를 내려놓는다. 긍정의 의미로 끄덕인다.) 아주 달지 않으면 조금씩 드시더라... 한 번 권해 볼게, 친구가 사 준 거라고. (웃는 얼굴로 마주봤다.)
오한설:(신경쓰지 않도록 여유로운 낯으로 마주보다 케이크에 시선 고정하면 저는 반대편 구석이나 살핀다.) …그럼, 알지. (알다마다. 넌 정에 약하고 쉽게 마음을 주니까. 내가 아니었대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며 애정으로 함께하는 사람을 둘러맸겠지. 전부 알면서도 웃기나한다. 어쨌거나 지금은 나와 함께니까. 어느새 얼음만 남은 컵은 트레이 위에 내려놓는다.) 그러고보니 언제 한 번 또 뵈러가야하는데. 그때를 위해서 잘 말씀드려줘. (머리 싹싹 쓰다듬는다.)
진수빈: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해사하게 웃는다. 어쨌거나 지금은 너와 함께니까. 운명같은 첫 만남, 알고보니 짝이었던 점이나, 실은 오랜 친구 사이였던 것,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단 사실, 기억에 느껴지는 이질감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무엇이 문젠가? 지금 내 마음이 너더러 좋다고 요동치고 있는데. 마주 앉은 게 네가 아니었더라면 바닥 보이는 컵에 조금은 덜 아쉬웠을 지도 모르지. 빨대 사이로 공기가 비집고 들어와 커다랗게 소리가 난다. 따라 내려놨다.) 알았어. 한설이 네 이름 제대로 말해 둘게. (머리에 손이 닿으면 동그랗게 뜬 눈이 요리조리 구른다. 포크를 달칵거린다.) 그럼 케이크... 잠깐 포장 부탁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오한설:(가벼운듯 애정 담긴 웃음소리. 머리에서 손 떼고 연신 끄덕인다.) 응, 다녀와. 포장하고 소화시킬 겸 산책이나 하자. (이번엔 네 말대로 얌전히 앉아 기다린다. 등을 보이면 다시 시선이 구석 이곳저곳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진수빈:(카운터에 케이크를 넘기고, 짧게 기대어 기다린다. 포장된 상자를 들고 종종거리며 돌아오는 건 잠시 뒤다. 트레이 들고 순식간에 정리까지 마치면, 네가 그랬듯 이번엔 제가 손 내민다.) 한 - 설. 갈까? (손 끝 까딱.)
오한설:(주변만 두리번대다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트레이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다.) 아, 응. (손짓에 피식 웃음이 샌다. 곧 손 잡고 바로선다.) 혹시 더 하고 싶은 건 있어? (의자 밀어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카페를 나선다.)
진수빈:(일련의 일들이 당혹스럽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다만 마주하고 있는 네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러나 겁이 나 자리에 붙박힌 채 가만 입을 맞춘다. 속을 들끓는 열감에 눈을 감고, 허공을 맴돌던 손은 네 옷자락을 붙잡았다. 네가 먼저 저를 놓아줄 때까지 그렇게...)
오한설:(역겨운 생물은 이미 사라졌지만 뒤돌아있기에 알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발버둥 같은 키스를 이어나간다. 한참 맺혀있다 흘러나오는 눈물의 온도가 미지근하다. 주체할 수 없도록 떨리는 손이 수빈의 뺨에서 목으로 자연스레 움직인다. 한참 후에서야 맞닿은 네 입술 위에서 입을 달싹인다.) ……가, 갔어?
진수빈:(물음에 조심스레 눈을 떠보면 저 멀리 보이던 연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첫 키스는 분명 달큰한 케이크 맛이 났는데 어째서 한가득 차오르는 마음은 도리어 짠 바다를 닮았는지. 옷자락 붙잡은 손을 놓고 안심시키듯 찬찬히 토닥인다.) 으응, 갔어. 이, 이젠 괜찮아, 한설아. 아무것도 없어.
오한설:(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리고 마주본다. 갔어. 이젠 괜찮아. 괜찮아, 한설아. 한참이나 네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등 뒤를 토닥이는 힘 닮은 목소리가 사그라들 때까지 젖은 눈으로 그렇게 보고있다가, 손등으로 네 입술을 문질러 닦아준 후에 제 눈물도 닦아낸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듯 미소 지어보인다.) …첫키스지?
진수빈:(마주하는 시간은 한참. 웃는 모습 보고 나서야 한 번 꽉 끌어안고 놓아준다.) ...그런 게 중요한 거야? (툭 내뱉은 말 뒤에 끄덕이긴 한다. 눈물 닦은 낯을 살피듯 눈치 봤다.) 하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어. 또,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였고... (속사정 묻는 일 대신 따라 억지 미소 지어 본다. 이유가 무엇이든 썩 좋지 않은 속내에 눈썹이 처졌다.)
오한설:(안겨서 떨리는 호흡을 마저 가다듬다가 끄덕인다.) …응. (제가 아는 수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홀로 짐작하며 더 묻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왜 궁금해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따로 없다. 그 역시 말하지는 않으려는 기색으로, 그저 한 번 더 감싸 안고 놓아준다.) 미안해.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속상해하지는 마. (네 손을 가져다가 부드럽게 쓰다듬다 깍지끼워 잡는다.) ……갈까?
진수빈:(숨, 입맞춤, 그 짧은 시간을 네 몫의 색으로 물들인 주제에 속상해 하지도 말라는 건 지독하게 이기적인 부탁이다. 그럼에도 대꾸하는 모양은.) 알겠어, 난 괜찮아. 너도 내게 미안해 할 필요 없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좋아... (꽤나 순순하다. 내비치는 말은 잘 포장되어 모난 구석 하나 없다. 한숨 닮아 가는 숨에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숨겨 내보낸다.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잡은 건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혼란스럽다. 말 없이 걸으면 조금이나마 나아지겠거니, 한 발 내딛었다.) 가자. (대꾸 끝에는 그저 웃는다. 언제나처럼.)
오한설:(괜찮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숨이 한숨을 닮았다. 그런 걸 놓칠 눈치는 아니었기에 덧붙인다.) …안 괜찮을 거 알고 하는 말이야. 나도 정말 괜찮으니까… 네가 날 괜찮게 만든 거니까. 그러니까 속상한 건 여기까지야. 알았지? (상황과 시간을 불문하고. 언제나와 같이 네가 해주는 말이 있다. “괜찮아.” 괜찮아, 헨리. 괜찮아, 한설아. 습관처럼 입에 붙어다니는 너의 괜찮아는 아무리 억지스러워도 전부 제쳐두고 네게만 귀 기울이고플만큼 위로가 된다. 수빈아, 언제고 나는 네 덕분에 겨우 괜찮을 수 있었다고 항상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나 더는 말 없이 잠잠하다. 맞잡은 두 손 사이에 발소리만 크게 울린다.)
오한설:(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다시 주워들고 고개를 든다. 드러낸 얼굴엔 뭐라 형언할 수 없을만큼이나, 세상의 모든 감정을 끌어다 섞어놓은듯 가장 짙은 것이 묻어난다. 흙먼지를 터는 시늉하지만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수빈아, 받아. 절대, 절대 잃어버리지 말고……. 네가 잘 간직해줘, 그림이 상하지 않게…. (종이를 네 두 손에 쥐여주며 당부한다.)
진수빈:(그 얼굴 마주하면 단박에 알아챈다. 아, 이것의 기저에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숨어있구나.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 너이기에, 무엇도 물어볼 수 없는 나이기에 손을 뻗어 얄팍한 위로라도 건네려다 보면 어느새 제가 그려진 종이가 쥐여져 있다. 영문 모를 말에는 당연하게도 긍정의 대답을,) 알겠어, 한설아. 잃어버리는 일 없을 거야. (따라 덧붙이는 것은 맑은 미소와 다정이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기도 했고, 애초에 집에 돌아가면 일기장 사이에 넣어두고 소중히 보관할 작정이었거든. 우리가 공유한 추억 조각을 함부로 대할 생각 없어, 나는. (표정을 마주하고 입을 달싹였다. 무어라 덧붙이려다 화가 쪽을 고갤 돌려 기웃거린다.) ...네 그림은 어떨지 궁금해.
오한설:(여전히 무엇도 말해주지 않고있지만… 마주보는, 젖은 동공 안에서 불처럼 넘실거리는 것은 무언가의 결의다. 몹시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깎은 듯, 수빈이 단박에 알아챌 수 밖에 없었을 결의가 비친다.) 정말로,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돼…. 혹시나 언젠가 내가 너무너무 미워져도, 그것만은 꼭 간직해줘……. (확답을 들었음에도 몇 번이나 다시 간절하게 당부한다. 그 후에 호흡을 고르듯 또다시 떨리는 숨이 새어나오면 제 앞머리를 털고 진정하려 노력한다.) …벌써 어두워졌다. 내 그림도 너 가져. 완성되면 바로 일어나자. 집에 데려다줄게. (그럼에도 정신 없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수빈:(그럼에도 불안치 않은 것은 네가 품은 결의가 결코 제게 독이 되지 않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언젠가는 그 너머 속사정을 알게 되는 날도 오겠지. 다시금 몇 차례 당부하는 목소리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절대. 그리고 내가 널 미워하다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가정이라 천연한 웃음 흘린다. 제 모습이 담긴 그림 다시금 쳐다보다 두 번 접어 손에 쥔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테니 걱정 마. (흘끗.) 나를 아주 잘 안다면서. (또 흘끗. 짧게나마 잡아 달라는 듯 빈 손 내밀었다.) 믿어 줘. (네가 저더러 그림을 간직해 달라 부탁했듯 너 역시 네 그림을 가져갈 줄로만 알았는데. 영 혼란해 보여 가만 수긍한다. 실은, 제 것보단 네 그림이 더 갖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언제쯤 완성 되려나.)
오한설:(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걷는다.) …오늘 재미있었어? 하루종일 나 때문에 정신 없고 피곤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 싶어서. (익숙하게 다정한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지만 신경 한쪽은 다른곳에 쏠려있는듯 군다.)
진수빈:물론 즐거웠어. 정말로.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마주 잡은 두 손이 느린 박자로 흔들린다. 신발코를 응시하며 걷다가, 고개를 들면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이 넓다. 차차 어둠을 먹어 짙어지는 하늘. 바라보고 있으면 시큰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자그마한 목소리로.) 한설아, 넌 오늘 어땠어?
오한설:나도 즐거웠어. (이쪽은 반대로, 어쩌면 붕 뜬 기분으로… 어둠이 내려앉아 물들어가는 하늘에 안정을 느끼며,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 위 두 발 붙이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손에 힘을 준다.) 너랑 있을 땐 항상 좋지만, 오늘은 평생 꼭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처럼. …그만큼 좋았어.
진수빈:......가, 갑자기?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저렇게 비탈 끝에 선 얼굴로. 저는 이런 상황에 매몰차게 돌아설 만큼 심술 궂은 사람이 아니라. 알겠어, 대꾸하는 목소리가 작다. 걸음걸음이 주춤이긴 하나 결국 부탁하는 대로 나아간다. 라디오 팟캐스트 코너 앞에 섰다.)
저...... 이,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뒤 쪽에 서 있을 널 흘끔 본다.)
라디오 진행자:오~ 지금 어떤 학생분께서 인터뷰가 하고 싶다고 직접 오셨는데요, (수빈을 본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진수빈:진...... 수빈입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이렇게 주목 받는 상황은 익숙치 않은데.)
라디오 진행자:그래요, 진수빈 학생~ 혹시 저희가 지금 하고 있는 이벤트가 어떤 건지 알고있나요?
바로 ‘이 순간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 인데요~(자문자답한다.) 자, 마이크에 대고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진수빈:으음... (마이크에 입을 대고 주저하는 시간이 길다. 영 주눅 든 낯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차분히 읊었다.) ......나를 만나러 와.
진수빈:(익숙한 형상을 목격하면 단박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러면 곧 달려가 안기는 모양새다. 한설아, 터져나온 숨으로 짧게 호명하고는 네가 그랬듯 볼을 감싸 입을 맞춘다. 충분하다 여겨질 때까지 맞붙이고 있을 작정으로. 자칫 했다간 영영 잃어버리고 말 거야. 끝없는 비탈 아래로.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떨리는 손끝이 볼에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오한설:(충격을 받은듯, 미세한 공포가 서린 눈으로 마주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저걸 쫓아내는 방법….
진수빈:(이런 걸 바라고 한 짓이 아닌데. 응시하는 눈빛에 마음 한 구석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부 아래 맥박이 불길하게 뛴다.) 채, 책을 읽었어. 선생님께 그 날 있었던 일을 여쭤보니 관련 도서를 한 권 쥐여 주셔서. (횡설수설 읊어내는데, 감정이 목 끝까지 타고 올라 음성이 먹먹하다.) ...멋대로 굴어서 미안. 네가 죽을까 봐. 영영 없어질까 봐. 두려워서, 그래서. 불쾌했다면 미안해.
오한설:(너의 입맞춤, 그리고 아주 잠시 벌어낸 시간. 길고 긴 쫓김에 너를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두려움을 뚫고 비집어 나오는 감정이 있다. 깊고도 오랜 시간 꾸역꾸역 담아놓았던, 그 감정. 애를 써도 주체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더 한참을 보고있다가…)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해, 수빈아. (축 처져 물기 어린 얼굴을 몇 번 쓰다듬곤 천천히 입을 마주댄다.)
진수빈:(주변 음성이 흐려지고, 감정에 먹혀 손 끝까지 바들거릴 찰나이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고, 네가 다가와 닿는 순간까지도 순순하다. 마주한 입술을 찬찬히 부비며 눈을 감는다. 가쁜 숨결이, 서로의 타액이 섞인다. 쉬이 만족치 못하고 기나긴 감정의 골을 메울 수준까지 오래토록 닿는다. 갈구한다. 한참을 어리광 부리곤 떨어졌다.) ...있잖아, 한설아. 여태까지 굴었던 영문 모를 태도들도 전부 그래서지?
오한설:(뜨거운 숨결보다 진한 어리광으로 몸의 떨림을 가라앉히고 감고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두려움이 가신 낯에 새로 떠오른 것은 결의. 온전히 바로 서서 수빈을 품에 끌어안는다.) …뭐가 그래서냐고 묻고 싶은데,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할 말은 딱 하나야. ……전부 너 때문이라는 거. (벌써 몇 번째 사랑고백이고 입맞춤인지. 기억력이라면 누구보다 낫다고 자부하던 그조차도 빛바래 가물하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로 네게 닿았다. 오랜 세월 그토록 찾았던 너에게.)
진수빈:(그 품에 안기면 이상하리만치 안정감이 든다. 고개 숙여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었다. 그래, 숨. 마른 나무 닮은 향을 잔뜩 들이킨다. 그 채로 웅얼거렸다.) ......나 때문이란 거. 나,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지? 응? (짧은 시간 강렬히 와닿은 네게 제대로 된 확신 받고자.)
오한설:(바다를 닮은 사람…. 바다만큼 넓고 깊은 속을 가진, 유약함에도 정작 무너질 만큼 지쳐만가던 자신은 언제고 끌어올리는… 종국에는 이런 순간까지 기적처럼 나를 살려내는 나의 사랑. 저도 네 목덜미에 얼굴 묻고있다가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대답한다.) ……시작부터 이렇게 될 거였나봐. …우리 못한 얘기가 많지. (잠시 힘빠지는 웃음으로 적막을 메운다. 곧 품에서 빠져나와 언제나처럼 손을 가져다 잡고 먼저 이끈다.) 나한테 시간 좀 내줄래?
오한설:(잡고있던 손을 가져다 매만진다. 깊은 애정 담긴 시선은 네게 붙박혀 떨어질줄을 모르고,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처럼 할 수 있는한 가장 느리게 입을 연다.) ……사실은, 나 네 친구 아니야.
(거짓말은 못하는 성정이므로 먼저 꺼낸 말이라고는. 그러나 곧 다시 덧붙인다.) …아니, 맞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난 아주 먼 미래의 사람인데, 그곳에서 언젠가 네 초상화를 봤어. (맞잡은 반대쪽의 손을 들어 네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매만진다.) 그날의 나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본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끌려서… 그날로부터 너를 찾아내기 위해 온힘을 쏟았어.
그러다가 어떤 라디오 전파를 들었어.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초상화 속 인물의 목소리일 것만 같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알아보니 정말 이 시간대의 라디오였더라고. 기적처럼. 그래서 네가 사는 시대에, 나에게는 아주 오랜 옛 시대인 이곳에 하릴없이 뺏겨버렸어, 내 마음 전부.
나는 고작 그 누렇게 변색돼서 연필 한 자루로 대충 그려진 스케치 따윌 보고선, 전부 버려두고 이곳에 오기로 했어.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신이 내 바람을 들어주더라. (느릿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데 조금의 문제가 있었지. 시간여행자를 뒤쫓는 괴물을 피해서 더 먼 과거로 오게됐는데, 거기에서 네 전생을 봤어. 수백년 전의 전생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네가 응당 죽음을 맞이하고나면 나는 다시 너를 찾아나섰어.
백사십세 번이나 네 환생을 지켜봤어. 수많은 너와 수많은 사랑을 했지. 너와 나눴던 마음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전부 다른 것을 붙여야 할 거야.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했어, 수빈아.
오한설:……라디오 전파는 끝도 없이 우주를 돈다고 하지. 어쩌면, 내가 네 초상화를 발견했던 것도, 네 목소리를 들었던 것, 내가 널 찾아낸 것, 내가 수많은 너와 사랑을 나누었던 것, 우리가 만난 것도. 라디오 전파가 나를 만나러오라며 나를 이끌었던 것도……. 이 순간조차 무엇이 먼저다 할 수 없도록 운명적인 반복들일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미래의 나는 또 너를 발견하고, 만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겠지.
수빈아, 네가 했던 ‘나를 만나러 와’는 내게 미리 보내주는 인사가 될 거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사실, 이런 설명은 오래 전에 몇 번이나 했었지. 너를 찾아낼 때마다. 널 보러왔다고, 내 현실을 버려두고 좇을만큼이나 넌 내게 기적 같은 존재라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네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일을 그만두게 됐어.
……네가 너무 슬퍼했거든.
(이미 했던 말을 다시 꺼낸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할 말은 딱 하나야. 전부 너 때문이라는 거. 널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 내 삶의 방향이 오롯이 너만 향하고 있었다는 거.
진수빈:(파편처럼 흘러갔던 사건들은 들리는 말로 하여금 무게를 갖게 한다. 그것이 어떤 터무니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쏟아지는 이야기는 저를 빛도 없는 암흑 속으로 떠밀고 헤매게 한다. 어지러이 피어나는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헤엄치고 도망치면 시선 끝에 바다가 닿았다.)
(가느다랗게 그어진 줄. 미세하게 흔들리는 경계가 파도치는 대양임을 가늠할 수 있게 하더라. 홀로 그러안은 사연 많은 땅끝 너머 세계. 머리 위 펼쳐진 거대한 하늘과 인위적인 도시 풍경이 그 흐리고 연약한 수평선을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옥상에 딛고 선 발 뒷걸음질 치면 제 시야 속에도 영영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돌풍처럼 활개치는 진실 속에 주체 없이 쓸려가다가,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했어, 수빈아. 손에 닿는 온기에 끌어 올려진다. 그러잡은 의지와 감정에 데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시야 속 번진 풍경은 저를 짓누르고, 시린 하늘에 숨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위로를 해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상념 뚫고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말을 건넨다고 진정으로 네게 가닿기나 할까. 그간 내가 몇 번을 달래 주었을까. 그럼에도 제자리인 것에 회한이 들어 물꼬를 트는 말이 작게 떨린다.)
내가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걸. 네가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 드러나는 슬픔을 억누르고 진정으로 의지가 되어줬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그러나 야속하게도, 백사십세 번의 자신이 그랬듯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나약한 감정의 표출이다. 표정만큼은 멀쩡히 웃어 보이며 잘 갈무리하나 싶더니 그마저도 시간 두고 무너지고 만다. 호선 그리던 입가는 파란 닮게 흔들리고, 버거워 찌푸린 얼굴에 잔잔히 물기가 들어찬다.)
(견디는 게 죽을 만큼 벅차 감정 풍파 몰려온다면 외면하고 도망치기 바쁜 그가 미성숙한 면모까지 드러내며 곁에 버티고자 하는 것은 전부,)
진수빈:과거의 내가 어떤 대답을 들려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백사십네 번째로 나에게 찾아온 순간부터 내 삶의 방향 역시 언제나 너를 향했어.
(...너를 사랑해서다. 기묘한 끌림, 설명할 수 없이 피어오르던 애정, 전생의 경험에 의해 새겨진 감정이라 여기면, 불확실은 확실이 되고, 바라보는 시선 끝 경의가 들어찬다.)
(사랑.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되어주는 그 농도 짙은 감정. 너를 이토록 닳고 지친 채로, 늘상 불안에 떨면서도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나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고, 요동치는 연민에 기어코 붙잡은 손 당겨 끌어안게 만드는 충동. 털어내듯 울고 나면 끝에 작은 의문이 든다.)
한설아, 힘들지 않았어?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어? ...... (라디오 전파는 끝도 없이 우주를 돈다고 하지. 그렇다면 시간 거슬러 하는 네 방황은 언제까지 이어질련지.) 몇 번째의 나에게까지 찾아갈 생각이야?
오한설:(기억조차 흐려졌을 먼 시간대의 이야기를 꺼냄에도 막힘 없는 점이나, 돌이키면 친한 친구사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서스럼없던 애정표현들을 해명한다. 그 오랜 여정을 정리하는 말은 단 한 줄, 네 안에 잠겨버린 까닭이다.
평생 새계절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시대에서도 넌 언제나 위태로웠다. 품에 한 번 끌어안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올해 여름은 유난히 청명해서 네가 말라 없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노력으로 세상만사 형통하지 않듯이, 세상엔 차마 말로 위로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엔, 운명적 사랑처럼 노력이 개입하지 않는 일도 있지.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속삭이고 돌아서는 길엔 또 다시 이별이다.
오한설:먼 미래 전부 내버리고 돌아, 네 죽음을 백사십세 번이나 지켜보면서까지 네게 닿은 것은 포기가 아닌 하나의 욕심이고, 바라던대로 마음이 통했다면 그걸로 된 일이다.
머리 만지던 손 내려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는다. 무너져가는 표정 지켜보면서 소리 없이 괜찮아, 내가 미안해. 라고 말하듯 눈을 마주친다.)
이 순간, 도망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돼서 괜찮아. …네 마음도 내게 향한다는 이유로 내 고통 다 깨어져서 괜찮아. 결국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 알게 되어서…… 나 정말 괜찮아.
오한설:(너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고, 나를 나아가게 만들어 우리 결국 다시 만나게 만드는 사랑. 끌려가 품에 안고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음, 아무래도 여기가 내 끝인 것 같아.
있잖아, 네가 날 돕는 바람에 그 괴물이 너까지 따라다니며 힘들게 할 거야. 본래 목적인 나를 잡아먹고나면 만족하고 사라질 테고. 이제 더는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진수빈:(마주치는 눈빛이 담고 있는 언어를 훔쳐 본 것만 같다. 그러면 마음이 철렁해 헛숨을 들이킨다. 더 나은 다음을 안겨주기 위해서 현재의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 생각을 골라내는데, 막상 들리는 말은 썩 형통하지 않다.) ......알아들었어, 하, 하지만.
분명 두려울 걸 알지만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는다면 위험할 일도 없겠지...... (읊어내는 언어가 작아지는 건 제 말이 한 순간 투정에 불과하다 느껴져서다.)
여태까지 네가 거쳐온 나는 널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은 거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아. 끝에 무엇이 있든 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시도해보고 싶어. 안 돼? 응?
오한설:(사랑하는만큼 지키고자하는 결심도 같은 양으로 피어오른다. 시간여행자가 틴달로스의 개들에게 먹히게 되면 존재가 사라져버리고 말 텐데 이렇게도 쉽게 제 존재를 내려놓는 것은… 오직 너만은 날 기억할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영영 이별이 아니라 결론내렸기 때문이다.) 너는 날 이미 여러 번 도왔었어. 그 덕분에 몇 번씩이나 큰 위험에 빠졌었고. ……수빈아, 그 괴물에게 잡아먹히면 죽고 말아. 매순간 딱 붙어있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저 괴물이 언제 우릴 죽이러 올까 두려워하며 사는 삶이 편안할리 없고. 네가 다치거나 죽으면 나는 또 기다리면 되지만… 넌 이번 삶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잖아.
수천 년 살아오는 내내 멈추질 않던 생각이 있어. 네가 나와 얽혀서 불행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등을 쓸어주다 부드럽게 떼어낸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물기 어려 눅눅하다.) ……언젠가 네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있지. 들어볼래?
오한설:……잠깐 못 본다고 영원히 보지 못하는 걸까? (잠시 목이 막혀 숨을 고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린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나 네 마음 속에 있을 거야.
진수빈:(오랜 침묵을 뚫고 결국 털어낸 이야기들에서 함께 살고 싶다는 의지를 읽었는데, 이토록 모순적인 결말이라니 한탄스럽다. 네가 체념 닮은 결심에 다다른 것도 딛고 온 삶들이 실패로 포장되었기 때문일 테지. 사랑이라 명명한 첫 번째가 지금의 자신이었더라면 무언가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마음이 차디찬 눈처럼 처참한 것은 그렇지 않아서다.)
네 삶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잖아, 한설아. 괴물에게 잡아먹히면 죽고 마는... (우리를 이리도 녹록치 않은 상황 속에 내던진 것은 시간을 거슬러 우주를 빙빙 도는 운명이다. 무엇이 먼저다 할 수 없도록 운명적인 반복들. 단념에 포기하듯 무너지면 이 흔적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양피지에 새겨질 것이고, 애처롭게 붙잡으면 다시 한 번 관성처럼 극복의 역사를 써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백사십다섯 번째에도, 백사십여섯 번째에도, 그 후로도 한참을.)
내가 진정으로 불행했다면 널 이렇게 붙잡는 일은 없었을 거야.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들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상대적이고, ...네 곁에 있을 때 느낀 감정들이 언제나 기쁨에 치우쳐져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안겨있던 몸이 떨어지면 무너진 표정이 마주한다. 곧 저를 구성하는 아주 큰 것을 잃을 것처럼, 혹은 이미 잃은 것처럼.) ......진짜 위로해주고 싶었다면 내가 그랬듯 '도망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주겠다' 맹세했어야지.
(더이상 붙잡고 매달릴 용기도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목에 걸린 묵직함만큼 설움이 들어찬다. 시선을 내리고 회중시계 로켓을 만지작 거리다, 그것을 열어 안을 본다.) 기, ...기억에 의존해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게 내 특기이긴 해.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읊는다.) 나는 분명 극복해내겠지만 그것에 닿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한참을 설움에 먹혀 무너진 채로 지내고 말 걸. (살랑이는 음성에 차오르는 건 체념이다. 순순하다.) 그래도 갈 거야? (다만 애처롭게 따라붙는 질문은 물 밑으로 뛰어들기 전 마지막 미련.)
오한설:(꽤 오래 말이 없다가 입을 연다.) 그 시계에, 큰 힘이 담겨 있어. 그래서… 내가 설령 그런 식으로 사라져,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잊는다고 해도 너만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있어. 네가 그러고만 싶어한다면……. 하지만 내가 곁에서 위로해줄 수 없으니, 아주 잠시라면 잊고 사는 것도 괜찮겠지.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냐.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줄 순 없지만, 되새기며 살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거야. 나를 구해 줄 날이 올 거야. (네 이마에 짧게 입맞추고 완전히 떨어진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
이 방법 뿐이야, 수빈아. 저들은 한 번 사냥감을 먹고 나면 만족해 사라져. 말했잖아, 네겐 한 번뿐인 삶이라고. 이미 여러 번 겪은 내게 휘둘리기엔 너무 불공평하지…….
…그리고 이기적인 말이지만, 지금까진 쭉 내가 너를 기다렸으니까, 이번엔 네가 그래 줬으면 해. 한 번만 날 위해 그래 줘.
(끝내 세운 결심이 닳고 닳은 체념이 아닌 것은 이유 모를 어떤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끝나기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커다랗다. 오랜 침묵을 뚫고 새어나온 의지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곧 도착할 편지처럼 조용히 우리 주위에 숨어 존재할 것이라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난다고 그랬지……. 수빈아, 기다린 후엔 나를 만나러 와.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에는 우리 정말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오한설:(주인공의 영원한 행복 직전에 작은 고난 쯤 있을법하잖아. 그리 속삭이고 웃는다. 느리게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편지란 걸 너무 오랜만에 적는 것 같아. 갑작스럽겠지만, 나는 사실 네 친구가 아니야. 아주 먼 곳에서 온 미래인이지. 그곳에서 난 내 가진 모든 걸 다 잃은 후에, 온전치 못한 몸으로 차마 죽지 못해 목숨만을 부지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어. 그러던 중 네 초상화를 보게 됐고, 라디오 전파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어. 지금의 너조차 무모한 선택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없을 만큼 마음을 전부 빼앗겨버려서, 종국에 나는 신을 만났어.
백사십세 번이나 사와 생을 반복하며… 다양한 이름이 붙여지고 성장하며 늙어가는 네 곁을 지키는 일은, 지겹거나 원망스럽기는커녕 충만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라디오 전파는 끝도 없이 우주를 돈다고 하지. 내가 네 초상화를 발견했던 것, 나를 만나러 오란 목소리를 들었던 것, 내가 널 찾아낸 것. 편지를 쓰고있는 이 순간조차 무엇이 먼저다 할 수 없도록 운명적인 반복들일지도 모르겠어.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건 이미 내 육신이 끔찍한 사냥개 무리에 뜯어먹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괜찮아. 네가 나로 인해 끝없는 쫓김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된 거야. 죽음으로써 우리만의 모든 역사가 잊히고 나면…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우리가 며칠 전 거리에서 받은 초상화를 먼 미래의 내가 발견할 것이고, 네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리고 난 또다시 홀린 듯 너를 찾아 시간을 거스르며 헤매겠지.
:고마웠어. 그 오랜 시간 네가 있었기에 억겁 같지 않았거든.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을 아우를 말은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