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10분 중 103분
2022
시즌 2개, 그리고 영화
시즌 3: 10화 “우리 그냥 울자, 젠.”
출연: 헨리 프로스트, 젠 마빈 슈트라우스
장르: 로맨스, 판타지
프로그램 특징: 힐링, 감명을 주는, 진심 어린, 로맨틱

 

세션카드 편집은 스프님께서 해주셨습니다!

 

2022.03.26 ~ 2022.03.28

플레이타임 약 2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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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어떤 용사가 있었습니다.
 
난세의 아이, 재앙 이래 태어난 신인류, 새로운 가능성.
 
용사의 사명은 재앙의 근원을 무찌르는 것이었죠.
 
그 용사의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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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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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입니다.
 
제국의 아침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새가 노래하듯 지저귀고 하늘은 푸른 물감이 번진 듯이 말갛게 파랗습니다.
 
당신은 호화로운 용사의 방 안에서 기분 좋게 몸을 일으킵니다.
 
비록 무시무시한 모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지만요.
 
뭐든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좋은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성년이 되는 오늘, 당신은 재앙의 중심으로 떠나야 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겠지요.
 
축복과 기대를 함께 받으며,
 
의무와 권리를 함께 지면서,
 
당신을 보살피고 가르쳐주는 황성의 사람들과 신전의 사제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입니다.
 
세상은 마왕, 젠의 마력에 지배당해 당장 제국의 변방만 나서도 그가 부리는 괴수들로 우글거리고,
 
세계는 그 재앙에 맞설 수 있는 성력을 가진 단 한 사람, 당신이 꼭 필요하다고.
 
난세에 태어난 당신은 성년이 되는 날, 사악한 마왕을 마주해야 한다고.
 
그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고 돌아온다면, 세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비로소 완전한 평화를 되찾을 거라고요.
 
어릴 적에는 당신에게만 주어지는 그 막중한 의무가 두려웠던 적도 있었지만,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속에 길러졌습니다.
 
그것을 배반할 수는 없겠지요.
 
이 날을 위해 수련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새삼 다짐합니다.
 
세계를 위해.
 
몸을 씻고 정복을 갖춰 입고 나면 누군가가 문을 노크합니다.
 
헨리 프로스트:네, 나갑니다. (터벅터벅... 문을 열어 누군지 확인한다.)
 
열어보니 노아의 얼굴이 마주합니다.
 
"헨리.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다. 출정할 시간이야."
 
그리고 지어보이는 건 익숙한 표정입니다.
 
미안해 하고 있군요, 그가, 당신에게.
 
헨리 프로스트:(부러 환히 웃으며 대꾸한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이 좋은 날에.
준비 다 됐어요.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정리하고 문을 나선다.)
 
검을 찹니다. 묵직합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처소에서 황성 내에 있는 작은 신전을 거쳐야 하지요.
 
이제 마왕을 무찌르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시 보지 못할 평화로운 풍경들을 새삼스레 눈에 담습니다.
 
새하얀 햇볕이 신전의 기둥 사이사이로 비칩니다.
 
화려한 출정식이 거행되는 날, 사제들은 분주합니다.
 
십중팔구 식에서 당신을 축복하기 위함일 겁니다.
 
벅적한 목소리들 가운데, 사제들의 음성이 들립니다.
 
헨리, 듣기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듣기
기준치: 40/20/8
굴림: 47
판정결과: 실패
(뭐라는 거지? 귀 후빈다...)
 
사제들의 말은 드문드문 잘 들리지 않지만,
 
"용사님?"
 
"이제 겨우 성년이시잖아."
 
"어쩌면 좋아."
 
정도의 문장들을 캐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용사라는 운명에 대해 가여워하고 있는 것 같네요.
 
하기사 저 사제들도 스물 얼마쯤 되었다지만, 당신은 이제야 성년이 되었으니까요.
 
잠시 느려졌던 걸음을 다시 빠르게 옮깁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볕이 눈부신 대전으로 나아갑니다.
 
기사단이 열을 지어 각 잡힌 채 서 있고, 옥좌 위에 위엄 있게 앉아있는 존경스런 황제께서 당신을 보고 몸을 일으킵니다.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옥좌 위에서 친히 내려옵니다.
 
"헨리 프로스트."
 
"이 제국의 자랑스러운 용사여."
 
헨리, 심리학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심리학
기준치: 40/20/8
굴림: 2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렇게 말하는 황제 폐하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편안해보입니다.
 
지나치게요.
 
그만큼 당신을 굳게 믿고 있는 걸까요.
 
"부디 세상을 꼭 구해주시오."
 
헨리 프로스트:(나이 먹을수록 걱정도 더 많아진다던데. 황제는 역시 좀 다른가... 그 표정 보고 잠깐 생각하다 고개 숙인다.) 예,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막중한 기대와 염원 속에, 당신은 오랫동안 하지 못할 인사를 그에게 올립니다.
 
기사단이 일제히 당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면 출정식이 거행됩니다.
 
당신이 걸음하는 곳마다 평화의 기원을 담은 융단이 깔리고, 아이들이 색색깔의 꽃을 헌화하고.
 
이윽고 먼 여정을 떠나는 당신.
 
햇살이 축복처럼 눈부십니다.
 
헨리 프로스트:(그 모든 풍경 눈에 담으려는듯 주변 둘러본다. 화려하고 좋네....)
 
화려한 풍경을 뒤로, 몇날 며칠을 걸어 변방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는 평화롭게 제국의 사람들에게 환대받으며 왔지만, 이제부터는 다릅니다.
 
국경에는 마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했으니까요.
 
과연 저 멀리 불길한 어두운 숲이 보이고, 인적은 점점 드물어집니다.
 
당신은 검을 빼듭니다.
 
괜찮습니다.
 
몇 번이고 수련했으니까요.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시작부터 겁먹어선 안 되는 일이지요.
 
당신은 용사잖아요.
 
이 세계의 구세주!
 
당신 몫의 세상이 끝나도록 두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자유가 눈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국경에 걸친 마지막 가난한 마을을 뒤로 하고,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갑니다.
 
나무 그늘은 빽빽하고 바람 소리는 고요합니다.
 
어둠입니다…….
 
순간,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빛납니다.
 
6마리의 마물이 당신에게 급작스레 달려옵니다.
 
마왕성으로 향하는 위험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헨리, 이성 판정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습니다.
 
전투 페이즈에 진입합니다.
 
전투는 약식으로 진행되며, 헨리 - 마물 1 - 헨리 - 마물 2 … 순으로 진행됩니다.
 
헨리의 선공입니다. 헨리, 자유 기능치를 굴려 마물을 처리하는 지문을 적어주세요.
 
헨리 프로스트:
근력
기준치: 45/22/9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눈에 보이는 마물 향해 칼 휘두른다....)
도검
기준치: 25/12/5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5
 
첫 전투이긴 합니다만, 그간 연습으로 쌓아온 내공이 있으니까요!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에 마물 1마리가 떨어져나갑니다.
 
이어 방심하고 있던 찰나, 옆에서부터 잠복하고 있던 마물 한 마리가 튀어나와 당신의 다리를 향해 입을 떡 벌립니다.
 
마물:
날카로운 이빨
기준치: 50/25/10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0
 
그 이빨이 당신의 견장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자그맣게 아려오는 느낌.
 
HP가 1 차감됩니다.
 
헨리 프로스트:(아프네... ㄱㅡ)
 
이어서 헨리, 공격할 차례입니다.
 
헨리 프로스트:(역시 검을 휘두른다. 유일한 무기니까...)
도검
기준치: 40/20/8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피해: 4
(하...)
 
일전에 스친 상처 때문일까요.
 
검을 휘두르면, 당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물이 손쉽게 피해 버립니다.
 
이어 당신에게 달려드는 것은 금방입니다.
 
마물:
날카로운 발톱
기준치: 50/25/10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피해: 2
 
날렵하게 몸을 굴러 공격을 피해냅니다.
 
헨리, 다시 공격할 차례입니다.
 
헨리 프로스트:잘했어... (다시 집중해서 검을 고쳐잡고 마물 향해 휘두른다.)
도검
기준치: 40/20/8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피해: 1
(미간 빡) 실전은 다르구나...
 
이제는 마물이 그르렁대는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의 주위를 맴돌던 마물 하나가 커다란 손을 휘두릅니다.
 
마물:
날카로운 발톱
기준치: 50/25/10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1
 
그리고 그것은 검을 붙잡은 팔에 스치고 맙니다.
 
옷이 베이는 감각과 함께, 통증이 따라옵니다.
 
HP가 1 차감됩니다.
 
헨리 프로스트:괜찮아! 버틸만 해. (들을 사람도 없는데 소리친다. 아픈데도...)
 
들을 사람도 없는데.
 
정말로?
 
"오, 맙소사!"
 
숨차게 검을 휘두르는 당신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두 사람의 발소리가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자, 어쩐지 황성에서 보았던 사제들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제들이라면 성력에 일가견이 있을 텝니다.
 
마물들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데에 용사인 당신만큼이나 힘쓰고 있는 이들이라 했으니까요.
 
이들은 용사인 당신을 알아보는 걸까요?
 
도와주러 온 걸까요?
 
"오, 헨리 프로스트."
 
…아무래도 그런가봅니다.
 
헨리 프로스트:(돌아본다. 사제들이구나. ..............하, 민망해.) 안녕하세요.
 
당신이 안심했을 적에,
 
"바보 같은 제국의 충견이 아니십니까?"
 
조롱에 가까운 어휘가 고막에 꽂힙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무어라 외자 마물들은 갑자기 다시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감춥니다.
 
궁정의 하얀 사제복과 달리 새카만 사제복을 입고 있는,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 광인처럼 낄낄 웃어댑니다.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 프로스트:(그 모습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묻는다.) 무슨 뜻이죠?
 
검은 사제: 무슨 뜻일까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반문한다. 당신의 눈을 바로 쳐다보며 비죽이면, 뒤의 무리들 가운데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우리가 당신을 얼마나 가엾고 어리석게 여기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헨리 프로스트:네, 모릅니다. 그러니 장난 말고 알아듣게 말해봐요. 바보 같은 제국이라니, 무슨 뜻이에요? (불유쾌한 티는 내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마물이 사라진 어둠 속을 가리킨다.) 입은 것을 보아하니 당신들, 궁정 사제도 아닌 것 같은데. 누굽니까?
 
검은 사제: 바보 같은 '제국'이 아니라, 바보 같은 '제국의 충견' 당신을 보고 하는 말이었습니다만. 먼 훗날 때가 되면 전부 알게 될 것입니다. (비웃는 것이 명백한 어조. 누구냐 물으면 그제야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한다.) 우리는 위대하신 '그분들' 앞에 다만 하찮은 존재임을 깨달은 한낱 신자일 뿐. 다만 궁정 사제에 비하면 섭하지요.
 
헨리 프로스트:아. (...바보가 나였구나.) 맨입으론 안 알려준단 건가요? 바보짓 하는 꼴 보면서 실컷 비웃을 요량인가봅니다. (아직 검을 집어넣진 않았다. 통증이 신경쓰여 잠시 팔 다리를 한 번씩 내려다봤다가 들리는 말에 고개 들며 눈 끔뻑인다. 도통 뭔 소리인지... 미쳐버린 마법사 모임인갑다, 그리 판단 내리고 대충 맞춰준다.) 그럼 당신들이 절 도운 것도 ‘그분들’의 뜻인가요?
 
검은 사제: 하나 아주 잘 알고 계시는 것이 있군요. (당신 바로 앞에 선 이는 무슨 자신감인지 검 앞에서도 하나 주눅 드는 기색 없다. 더불어 상처 곳곳에 여러 시선이 스치는데, 선뜻 나서는 자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로브를 눌러쓴 몇몇 사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다가,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어 큰 웃음소리가 번진다.) 미련한 질문은 집어 치우고, 그것 말고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가령, 당신이 곧 보게 될... 온 재앙의 근원이라는 자 말입니다. 그도 아니면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 세상의 끝이라든가.
 
헨리 프로스트:(비웃음 사이에서 한 번을 웃지 않고 가만 듣고있다가 흙바닥에 검 내리꽂아 짚고 선다.)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나본데 듣지 않을 이유 없죠. 재앙의 근원이든 세상의 끝이든… 말해봐요.
 
검은 사제: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다.) 재앙의 탄생은 난세를 빚었고, 그 난세에 태어난 것이 당신....... 이 세계의 진실과, 그대와, 마왕과, 또....... (뜻 모를 단어들을 나열하다 크게 숨 들이키고 큰 소리로 읊는다.)
.........모든 것이 결국 운명의 농간입니다!
 
그들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납니다.
 
"세계의 끝으로 가시면 비로소 알게 되겠지요."
 
그 말을 끝으로 자박자박 멀어져가는 발자국.
 
아무 일 없던 듯 사라집니다.
 
헨리 프로스트:멋대로 나타나서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멋대로 가버리고. 도와준 건 고마운데 말씨도 재수 없고 영 이상해서... (입맛 쩝 다셨다가 다친 팔 움켜쥔다.) ...운명이든 뭐든간에 힘이나 좀 더 기를걸.
 
기분 탓일까요…. 눈을 돌리면 숲속의 어둠은 한 겹 더 짙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 향합시다, 헨리.
 
남은 여정이 깁니다.
 
헨리 프로스트:조금 다쳤다고 머뭇거릴 순 없지. (이어 걷는다.)
 
마왕에게 가는 길을 필사의 각오로 막기라도 하듯 괴수들은 발길을 뗄 때마다 달려들었지만,
 
당신은 어렵사리, 그러나 용맹하게 그들을 처치하고 빛나는 핏물로 그득한 비린 명예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습니다.
 
대륙의 끝으로 가면 갈수록 땅은 척박해지고, 바람은 거세지고, 발걸음을 떼기는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어긋난 계절과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발은 기이하게까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날은 결국에 다가오고야 맙니다.
 
눈을 들면, 저 멀리 희끗하니 보이는 검은 성채.
 
잠깐 걸음을 멈춥니다.
 
저것이, 마왕이 산다는 세계의 끝 죽음의 성.
 
뒤로 펼쳐진 것은 지독하게 새파란 수평선입니다.
 
바다입니다.
 
바다가 입을 벌리고 버티고 서 있습니다.
 
숨을 삼킵니다.
 
냉랭한 바람을 타고 소금 향이 날아듭니다.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지독한 중력에 짓눌리는 듯한 힘.
 
세상의 끝에 선다는 것은 이토록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던 걸까요.
 
마음 속으로 두려움이 찾아들었습니다.
 
손끝이 마구 떨렸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지난 날이 떠올라 생경한 공포가 차올랐습니다.
 
헨리, 이성 판정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용사지요.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더 두려운 것일까요.
 
축복해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이 압도적인 적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용사 헨리는, 숨을 들이킵니다.
 
문득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면, 12마리의 마물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점점 좁혀옵니다, 포위해옵니다.
 
전투 페이즈에 진입합니다.
 
약식으로 진행되며 회피 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헨리 - 마물 1 - 마물 2 - 마물 3 - … 의 순으로 공격 턴이 돌아갑니다.
 
헨리 프로스트:(물러설 곳도 없다... 빠르게 검 꺼내 휘두르고본다.)
도검
기준치: 50/25/10
굴림: 53
판정결과: 실패
피해: 3
 
헨리, 공격에 실패합니다.
 
사방에서 당신을 향해, 공격해옵니다.
 
마물:
날카로운 발톱
기준치: 50/25/10
굴림: 34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1
 
커다란 발톱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HP가 1 감소합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기분입니다.
 
마물:
날카로운 공격
기준치: 50/25/10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2
날카로운 이빨
기준치: 50/25/10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피해: 2
 
HP가 2 감소합니다.
 
공격이 허리에 맞고, 헛숨을 들이킵니다.
 
예리한 고통이 머리를 찌릅니다.
 
헨리, 어떤 심경인가요?
 
헨리 프로스트:이러다 마왕 얼굴 보지도 못하고 죽는 거 아냐...? (한발 빠르게 주마등이 스친다... 내가 싸움엔 재능 없는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노아...)
 
마물:
날카로운 발톱
기준치: 50/25/10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피해: 1
날카로운 공격
기준치: 50/25/10
굴림: 26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3
날카로운 이빨
기준치: 50/25/10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1
 
HP가 4 감소합니다.
 
생경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했나요?
 
헨리 프로스트:(아찔하다...)
 
그리고 하나의 마물이 이빨로 당신의 어깨를 콰득, 물어뜯습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 착각할 법한, 발버둥에 불과했을까요.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싸웁니다.
 
계속, 계속 몸을 움직입니다.
 
이런 곳에서 개죽음 당하기 위해 기어코 살아온 삶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야가 가물거릴 때 즘, .......... 당신은 겨우 당신을 향해 달려들던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지만요.
 
그럼에도 걸어가려 발을 움직이는 순간.
 
…...전부 물리친 줄 알았는데.
 
이제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박쥐처럼 생긴 마물들이 다시 몰아칩니다.
 
머릿수를 세어보니 24마리입니다.
 
헨리 프로스트:장난하나... (일단 검이나 쥔다...)
 
아까보다 더 버겁게 느껴지는 건 지친 탓의 착각일까요.
 
끝이 없이 들이닥칩니다.
 
비린 피냄새와 몰려오는 숨찬 두려움, 지긋지긋한 살육을 자행하며 검을 휘두릅니다.
 
키에엑―!
 
마물이 비명을 지르고, 그럼에도 다시금 달려들어 당신을 물어뜯기 시작하고,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찔한 고통이 두 눈을 감깁니다.
 
아,
 
더이상은,
 
더이상은…….
 
당신의 목줄기를 물어 뜯기 위해 달려드는 마물이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것을 마지막으로,
 
헨리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눈을 뜹니다.
 
당신은 침대에 눕혀져 있습니다.
 
천장이 희고 눈부신 빛으로 일렁입니다.
 
붉은 햇빛이 어딘가에서 비쳐 들어오고….
 
안락합니다.
 
마치 돌아온 것처럼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목줄기를 물어뜯던 짐승의 이빨, 고통이며 감촉이 남은 듯 아직도 선연한데.
 
꿈이었던 걸까요?
 
둘러보면 그러나, 용사의 방도 황성 안도 아닌 처음 보는 장소입니다.
 
헨리 프로스트:말로만 듣던 천국인가. (몸부터 일으킨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움직이자 몸이 삐걱입니다.
 
정신이 돌아오자 곳곳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무래도 꿈은 아니었나 봅니다.
 
상처 부위에 견고하게 감겨 있는 붕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대로 시간만 흐른다면 상처는 잘 아물 것 같았습니다.
 
헨리 프로스트:(팔뚝의 붕대 위로 손대고 쓸어본다. 손 닿는 부위마다 예리한 통각이 일어나는 걸 봐선 아직 살아있음이 분명하다.) 분명 마왕성 바로 앞이었는데... (통증이 낯설지도 않아 주변이나 둘러본다.)
 
테이블침대거울창문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암만 봐도 평범한 방이군. (누워있는 침대 더듬대며 이리저리 살핀다.)
 
당신이 누워있던 침대입니다.
 
희고 푹신합니다.
 
다만 조금 오래된 것인지 삐걱이는 나무 소리가 나네요.
 
관찰 판정을 할 수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침대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들을 발견합니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었습니다.
 
바스라질 듯 종잇장이 바짝 말랐습니다.
 
마구 휘갈겨진 불친절한 글씨로,
 
'왜', '어째서', '그만두고 싶어……',
 
'이건 악몽이야.', '세상의 끝?'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지능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휘갈겨 썼는데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익숙한 글씨체이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이곳은 생애 처음 오게 된 곳인데…. 왜일까요?
 
헨리 프로스트:이건 웬 일기... (종잇장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바스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불 위에 올려둔다. 힘겹게 일어나 테이블로 향한다.) ...실례합니다~.
 
정갈한 원형의 나무 테이블입니다.
 
어쩐지 사용감이 좀 있습니다.
 
헨리, 관찰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잉크 병과 초록색 만년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쓰고 있었던 걸까요?
 
헨리 프로스트:만년필 멋진데... (침대 힐끔 본다. 이런 멋진 만년필로 저런 글씨를...)
(시선 떼고 창문으로 향한다.)
 
척 봐도 지상과의 거리가 꽤 되는 높이입니다.
 
뛰어내려 탈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군요.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붉었던 까닭입니다.
 
저 너머 보이는 바깥은,
 
드넓은 바다입니다.
 
붉고 노란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바다요.
 
쏟아지는 눈송이와 어우러져 꽤 아름다운 정경을 자아냅니다.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군요.
 
괜찮다면 잠시 감상합시다.
 
헨리 프로스트:(창 너머를 응시한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하는 목적의 여정인데 이리 여유부려도 되는 건가. 그럼에도 짧지 않은 시간 붉은 물결에 시선이 머문다. 살던 곳의 노을과는 사뭇 달랐다. 바다에 반쯤 잠긴 태양과 구름… 와중 난세에도 바다는 얼지 않는구나 하며 별다를 것 없는 감상이나 떠올렸다.) ...분명 몰골이 말이 아니겠지. (사념 떨쳐내고 거울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긴다.)
 
무엇인가 오래된 듯한 이 방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며 새 것처럼 빛을 내는 물건입니다.
 
깨끗하게 비치는 거울 위로 헨리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데,
 
문득 거울을 보는 눈길 안으로, 이곳에 선 거울 안의 자신이 낯설지 않음을 느낍니다.
 
어째서?
 
왜?
 
헨리 프로스트:(난 원래 어디서든 잘 어울리니까...)
(더이상 볼 것도 없어보이고... 절뚝이는 다리 이끌어 문쪽으로 향한다.)
 
걸어 나가다 보면 문득 허리춤이 허전합니다.
 
방 안을 둘러 보아도 가져왔던 검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풍스런 나무 문입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네요.
 
헨리 프로스트:(잃어버렸네... ...할 수 있나? 주먹 꽉 쥐고 봐도 잘 모르겠어 일단 나간다. 할 수 없으면 어쩌겠는가...)
 
문 바깥으로 나서면, 여전히 하얗게 일렁이는 천장.
 
높게 솟은 성채의 뾰족한 지붕은 마법처럼 투명하여 눈 안에서 붉은 햇살로 반짝거리고, 성 안은 마치 거대한 온실 같습니다.
 
여름 햇볕 안에 들어와 있는 마냥 따스하고 안온했습니다.
 
가운데가 뻥 뚫려 난간에서 홀을 내다볼 수 있는 구조로 중앙 홀은 그 가운데 꽃마저 드문드문 화려하게 피어 있습니다.
 
당신은 불현듯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흉흉한 마왕성을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마왕에게 잡혀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멍한 채로 당신은 발걸음을 옮깁니다.
 
잘못 찾아온 것일까요?
 
혹은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꿈 속일까요?
 
선한 누군가가 당신을 이곳까지 옮겨다준 걸까요?
 
아니면 이조차 마왕의 술수일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입니다.
 
"…...헨리."
 
호명하는 목소리.
 
고개를 들면 짙푸른 머리칼에 하얀 눈동자를 지닌, 또래의 남성이 서 있습니다.
 
어쩐지 마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황성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두려워하듯 이마에 난 뿔도, 뒤집어쓴 새카만 망토도, 박쥐의 것 같은 날개도 없습니다.
 
마주치고서 영원처럼 굳었던 당신.
 
순간 말이 없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당신의 앞에 선 그입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작게 웃는 모습에 멋쩍은 기색이 가득하다.) …...노, 놀랐으려나.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젠 마빈 슈트라우스:내가, …...마왕이야. 젠 마빈 슈트라우스라고 하는데…
 
어쩐지 머뭇거림이 가득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별로 놀란 눈치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렇군요. (그 말에 풀어졌던 주먹 도로 쥔다. 의외로 차분한 첫인상에 일단 이후 행동 지켜보려는 얼굴로 살핀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침묵이 길어지면 내내 미묘하게 비껴나가 아래를 향하던 시선도 위를 향한다. 조금씩 눈을 들어 너를 바라봤다.) 도착하기도 전에 심하게 다쳐 있어서 치료해줬어. (짧게 눈치 본다. 주눅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치료해 줬어요.
 
헨리 프로스트:(그 말에 미간 찌푸린다.) 내가 당신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단 걸 몰랐나봅니다. (왜 주눅이 들었지. 치료해줬다는 말 하며 저 태도하며 전부 의문 투성이다. 마왕이라면서. 방심하도록 꾀를 부리는 건가? 속아줄 성싶나?) ...어쨌든간 감사합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아니, 알아. ...알아요. (한 쪽 입꼬릴 올려 까딱인다. 어색한 분위기 속 습관처럼 목 뒤를 쓸고, 떨리는 숨을 삼킨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이 너무나도 오래된 사람처럼, 드문드문 잇는 음성이 어눌했다.) 승부는 공평한 편이 좋으니까요. 마물들에게 묻혀 힘 없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봤더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치료해 줬을 거예요. (조심스레 한 발자국 다가가 섰다. 겁도 없이.) ...아, 아까 보니 다리를 다쳤던데. 서 있는 게 힘들진 않나요?
 
헨리 프로스트:(별... 웃기는 소릴 하는군. 나야 이미 죽을뻔한 목숨이니 다행인 일이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겠네요. 그래서 그렇게 소심하게 구는 겁니까? 마왕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가오면 곧바로 경계하듯 자세 고쳐 선다. 그리고 뒤늦게 답한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렇다기보단, 나는...... (흐릿한 음색에 이어지는 침묵이 길다. 경계하는 자세 목격하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 마음 사이 간격은 그 배로 머나먼 것 같아 서운한 감정이 울컥 쏟아진다. 다만 욕심 부려 무작정 다가가 서면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 ...... 마왕이란 이름에 걸맞은 행동이란 건 뭔가요? (어깨에 걸친 망토 제외하곤 잠옷에 가까운 차림새. 검고 헐렁한 바짓자락 한 쪽을 붙잡고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적어도 승부는 내일 보려고 하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헨리.
 
헨리 프로스트:(멈춘 걸음에 잠자코, 뒤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다가 한숨 쉰다.) 재앙의 근원이라면서요, 나는 당신이 그 누구보다 악하다 말하는 곳에서 배우고 자랐습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죽여 마땅한 존재라고 하는 곳에서요. 생각해봐요, 그런 내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흐릿한 간극 속 서운함을 읽었다. 어린 티 물씬 나는 행동거지는 또 무엇이며… 나 원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부터가 진심이지? 헤아리려 눈을 가늘게 뜬다.)
심리학
기준치: 40/20/8
굴림: 71
판정결과: 실패
 
젠 마빈 슈트라우스:...... 믿어주세요. (대꾸하는 말은 단순 고집이다.) 필요치 않은 말을 속에 삼켜둘지언정 거짓을 입 밖에 내뱉는 편은 아니거든요. 여기엔 나 말고 다른 이가 없어 즈, 증명할 방도는 없지만...... (입이 삐쭉거린다. 소심한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누군가 마왕은 이런 것이다 본보기를 보여 주었더라도 이 천성으로는 그 껍데기라도 흉내내지 못 했을 것이다. 불안정하게 마주하는 눈빛 속 일렁이는 것은 명백한 미성숙이다.) 제국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인간의 눈으로 인간 아닌 것의 속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더랍니다.
 
가느다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온통 진심처럼 느껴지네요.
 
이 농간에 쉬이 넘어가서는 안 되겠죠, 헨리.
 
헨리 프로스트:(저건… 투정?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싶었지만 눈썹만 한 번 들썩이고 만다.) 다른 이가 있대도 내 입장에선 믿을만하지 않을 테고요. (불안정한 눈빛 앞 견고한 태도로 마주한다. 어쩜 이리 유약해 뵈는 마왕이 다 있는지.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세상이 끝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맨몸인데다 무작정 뛰어든다고 이길만큼 몸이 성하지도 않고. 기분이나 맞춰주다보면 뭐라도 얻어낼 수 있을까 이전보다 부드러운 투로 묻는다.) …뭔가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별 대꾸 못하고 끄덕인다. 얌전히 경청이나 하고 있으면 들리는 말씨는 꽤나 누그러진 채다. 이는 작은 허용으로 느껴졌으며, 그는 그런 틈을 놓치는 이가 아니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팔을 뻗으면 끌어 당길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선 뒤에야 바닥에 직직 끌리는 걸음이 멈췄다. 살금 눈치를 본다. 헛숨을 들이킨 뒤 작게 이어가는 말은 어딘가 청명한 것을 품고 있었다.)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제국 사람들의 생은 어렵거나 궁핍하지 않아요? 여전히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증오하나요...... (기도하듯 모아 잡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온 세상을 뒤덮은 재앙의 근원이라기엔 그는 너무도...)
 
헨리 프로스트:(다가오는 걸음에 티내지 않아도 여즉 긴장한 채다. 경계하며 물러서야할까. 다만 제 앞에 선 이가 세계의 재앙 품고있는 마왕이라기엔… 온 전신을 둘러싼 태도가 상상해왔던 요소들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하는 말마다 어색함만 두드러질 뿐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 그대로 입만 열어 답한다.) …궁핍한 자 존재 않는 시대는 없죠. 지금은 난세이니 더욱 그렇고요. (난세의 아이, 세상을 구할 용사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평화만을 목격하며 자랐으나 몰라도 되었을 것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 용사였으니까. 아무리 어리숙해보여도 스스로 마왕이라 소개하는 이를 좋게봐줄 이유 없다. 소중히 모아 쥔 손에 시선 두었다가, 미소 두르고 네 얼굴 표정 하나하나 뜯어본다.) 꼭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것처럼 구네요. 당신에게 중요한 일인가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 렇구나. (한참을 상념에 잠겨 입만 달싹이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난세니까, 더더욱. 나 때문에...... (순간 그늘처럼 울음이 진다. 모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감정 풍파 흘려보내기 위해선 억지로 웃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발 딛고 살아가는 이라면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굽은 어깨가 짧게 떨렸다. 용사의 비어있는 허리춤을 물기 어린 시선이 훑는다.) 커다란 칼을 차고 목숨까지 내던지며 내게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잖아요. (검지 손가락을 뻗어 네 손등을 쓰다듬듯 톡톡 건드린다. 주의를 끌고 나면 손바닥을 보이며 내민다. 붙잡자는 듯, 붙잡아 달라는 듯 꽂히는 시선이 애처롭다.)
 
헨리 프로스트:…그거 진심이에요? 새롭지도 않은 대답일텐데도 울상 지을 정도면서. 스스로 죽을 생각은 해본 적 없나봐요. (결국 묻는다. 그래 네 말대로다. 재앙을 불러온 작자와 시대가 어쨌니 만담하자고 목숨 내던지면서까지 달려온 게 아니니까. 설마 손 잡아달라는 건가. 지금 장난하나 싶어 그 손바닥 쳐다보던 시선 들어 잠시 미뤄뒀던 질문을 꺼낸다. 부드러운 눈빛 속에 냉랭한 피로가 섞였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칼은 그쪽이 가져갔어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설사 그게 가능했더라도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은 너무 무섭고, 두렵고, 또... (핑곗거리들을 한참 입에 담으며 어물거린다. 이름은 그냥, 알았어요. 짧게 툭 내뱉고는 입 꾸물댔다.) 네에, 여긴 둘 뿐이니까요. 그 검을 가져간 건 당연하게도 나예요. (그 대처가 없었더라면 제 목은 진작에 몸통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을 게 분명하며, 이렇게 평화로이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을 테니까. 물음에는 성실히 고개 끄덕이며 답한다. 이어 사소한 감정 표현 마주하면 미묘하게 기가 죽는데, 펼친 손은 꿋꿋이 든 채다. 긴장한 것처럼 손 끝이 바들거린다.) 그 검도, 푸른 검집도 때가 되면 다시 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서, 성 안 쪽을 안내해 주고 싶어서 그런데, 손 잡아 주면 안 돼요? 아무것도 안 할게요, 정말. 약속할 수 있어요.
 
헨리 프로스트:그럼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데요. (대부분의 말을 어물대는 말로 넘기는 게 답답하면서도 황당하다. 순순히 대답해줄 거라면 제대로 말을 하던가, 싫다면 아예 말을 하질 말던가….) 그냥?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겁니까? 당신… 아니, 젠. 꼭 나를 알고있던 것처럼 굴고있으면서. (초면의 상대에 대한 염려나 배려 따위 보일리 없다. 당연하게도 당신은 마왕이니까. 잡아주긴 커녕 바들대는 모양이나 물끄러미 보다가 툭 뱉는다.) 아니면 뭐, 애정결핍인가봐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랍시고 대접이라도 하겠단 건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마왕님이라 그런가 취미 한 번 고상하군 그래. 부드러운 말투는 당장 붙잡고 싸우지 않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고 적대심은 여전하다.) …손 같은 거 안 잡고도 충분히 안내 가능하지 않나. (그러나 한숨 쉬었다가 방금까지도 무시했던 것이 무색하게 손 가져다 잡는다. 저따위 수작질 좀 한다고 불쌍하게 보면 안 되는데. …아무튼 검을 돌려준댔으니까. 내세운 약속이 말뿐이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시금 기분 맞춰준단 핑계 댔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 아주 긴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쳐야 할 만큼요. (대꾸하기 곤란한 말들이 들리면 괜히 시선을 피하고 만다. 머리를 써 무어라 꾸며내기라도 하는지 한참 정적 속에 서 있다가 입을 뻐끔거린다.) 소개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다, 당신이 헨리 프로스트라고. 백금발의 머리칼, 하늘에 그려진 오로라를 닮은 눈동자.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어요. 마주치는 게 처음이래도 몰라볼 수 없을 만큼. (애정결핍이라.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채 자라왔으니 딱히 부정할 만한 이유는 없다. 다만 민망한 감정이 마음에서 피어올라 온 곳으로 퍼졌는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것도 그냥, 그러고 싶어서. (꽂히는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다 온기가 겹쳐지면 화색한다.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헨리 프로스트:얼마나 긴 시간? ……. (네가 말머리를 떼기 전 뜸들였던 만큼이나 말꼬리가 길다. 대관절 누구의 소개란 말이야? 그답게 앞뒤 맞지 않는 것들은 콕 집어낼 줄 알면서도, 마왕이라기엔 외양이나 태도나 하나같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고 많은 인간 중에서도 극히 선하고 순진해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캐물을 각오에서조차 김이 새고 마는 것이다. 보석이라면 몰라도 오로라를 닮은 눈이라니.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데. 벌건 볼에나 시선 한 번 줬다.) 지금까지 꽤 많은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당신,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 없는 거 압니까? (불평이나 중얼대고 느린 걸음으로 절뚝이며 이끌린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해는 다 지고 완연한 저녁입니다.
 
마왕, 그러니까 젠은 엉뚱한 소리나 하며 당신을 다이닝 룸으로 인도하고…….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성찬을 보며 당신은 잠깐, 놀랍습니다.
 
죽여야 할 상대와 이런 진수성찬을, 사이좋게 식사라니요!
 
체리청을 채운 자몽과 허브솔트를 뿌려 구운 연어, 플레인 머핀과 찍어먹을 수 있는 꿀과 생크림, 후식으로는 얼린 멜론.....
 
가장 안쪽에 자리하는 건 마왕이며, 문가에 위치한 의자를 끌어 당신은 그 맞은편에 앉습니다.
 
이렇게 보니 꼭 마지막 만찬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헨리 프로스트:(독이 든 건 아니겠지? 미동 않고 젠 먼저 뭐든 입에 집어넣을 때까지 기다린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식기를 들어 구운 연어를 한 입 크기로 자른 다음,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익숙하게 눈치 한 번 봤다.) ....배, 별로 안 고파요?
 
헨리 프로스트:아뇨. 독이라도 들어있을까 봐서요. (그제야 포크 나이프를 들고 연어를 썬다.) 당신 말곤 아무도 없다더니, 직접 요리한 겁니까? (마왕이면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본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단숨에 눈꼬리가 내려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제대로 회복하고, 승부하기로 한 내일이 되기 전에는 충분히 안심해도...... 될 텐데. (그리고 그 접시에 집요한 시선이 꽂혔다. 정말 먹기 전에는 눈을 떼지 않을 요령인지. 물음엔 작게 끄덕인다.) 하지만 내내 이런 식사를 한 건 아니에요. 오늘은 당신이 방문해 준 날이니까... 이런 특별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어요. ...별로예요?
 
헨리 프로스트:(축 처지는 눈꼬리나 집요한 시선등에도 별 반응도 없이 마주보다가 이내 적당한 크기의 연어 조각 입에 넣고 씹는다. 전부 삼켜내고서야 대답을 이어간다.) 솜씨가 좋네요. 마왕성에선 기일도 이브를 따지나봅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입을 달싹인다. 손을 뻗어 머핀 역시 조각내곤 하날 집어 입에 넣는다.) 그래야 헤어진 뒤에도 기억하고 시간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난 이제 매년 이맘 즈음이면 이 풍경을 떠올리게 될 거예요.
 
헨리 프로스트:싸움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게 당신이란 확언입니까? 당신이 이딴 수작질만 부리지 않았어도 이틀 뒤부턴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 따위 깔끔하게 잊을 수 있었텐데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음식을 씹는다. 연어인지 머핀인지, 혹은 과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앉은 인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추억이든 특별이든 내겐 별로 좋지 않은 일이란 걸… (잠시 멈췄다.) 알아서 또 어쩌겠습니까. 의미 없군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 그런 셈이죠. .....몇 번을 되뇌어 봐도 그 편이 낫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멜론마저 한 조각 집어 먹고 나면 식기를 내려놓고 처음처럼 정리한다. 냅킨으로 입가를 적당히 닦았다.) 지금은 내가 불쾌하고 아주 끔찍하게 여겨질 지 몰라도, 결국은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나, 그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배려하듯 굴었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이게.)
 
헨리 프로스트:누구에게 좋단 겁니까? …설마, 나? (손이 멈추고 헛웃음 샌다. 결국 반도 못 먹고 식기 내려놓았다. 가증이나 위선으로 들리긴 커녕 그저 황당할 뿐이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젠 마빈 슈트라우스:나와 당신 둘 다에게...... (저 멀리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는다. 손 끝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헨리, 정말이에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증명할 방도 하나 없지만요.
 
헨리 프로스트:뭐가 나은 편이고 뭐가 정말인지 지금껏 하나도 들은 게 없는데. (눈빛 하나 잠시 흔들리는 기색도 없다. 들은 체도 않는 표정으로 주시하는 거라고는 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작은 습관이나 목소리, 말투 정도.) 말로나 믿으라고 믿으라고 호소해도 뭘 믿어야할지 알지 못하니, 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렇게 아주 긴 시간 말 없이 고민한다. 손을 틱틱 뜯다가, 내려놓았던 식기들을 가볍게 건드리기도 해 보았다가, 이내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있잖아요. 날이 넘어가기 전엔 뭐든 해를 끼치진 않을 테니, 당신도 오늘 하루는 속는 셈 치고 그냥 따라와 줄래요? 적어도 나, ... 나한텐 더 많은 추억들이 필요해요.
 
헨리 프로스트:……. (그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자리나 지켰다. 목 축이며 내내 쳐다보다가 따라 시선 올라간다. 끄덕인다. 지금 당장은 무기도 없고, 이런 맨몸으론 뭘 꾸몄든 저항 한 번 못하고 죽을 게 뻔하니까.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마음대로 하세요. 목숨 내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와 겸상까지 했는데 뭘 못하겠습니까.
 
젠 마빈 슈트라우스:......... (휘적거리며 걸어가 금세 곁에 선다. 복도에서 다이닝 룸으로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한 손을 펼쳐 네 쪽으로 내민다. 잡아 달라는 듯 흔들었다.)
 
헨리 프로스트:(다가오는 모습에 천천히 일어난다. 의자 밀어넣고 손 잡았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스킨십을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돌아가면 책이라도 써야겠습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책을. ......제목은 뭐라고 할 거예요? (붙잡은 손 꼼지락거리다 실없는 질문 툭 던진다.)
 
헨리 프로스트:내 이름이요. (물음에 입꼬리 올려 웃으며 곧바로 대답한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당신 답네요. ......'마왕'보단 이왕이면 '젠'이라고 적어줬음 좋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저 치가 사악한 마왕이라니.
 
다이닝 룸을 나와 우리는 성의 홀을 지나갑니다.
 
아까 전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습니다.
 
정원이라기엔 작은 규모지만, 어쨌건 무성히 핀 연분홍 장미는 천장과 수많은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물들었네요.
 
헨리, 교육 판정을 할 수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나의 마음 당신만이 아네.'
 
별 뜻도 없을 마왕의 정원을 뒤덮은 꽃의 의미입니다.
 
마왕의 정원이라면 좀 더 악의 어리고 짙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지요.
 
생각보다 인간적인 그에게 생의 동반자라도 있다면, 혹은 그럴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꺾어 바칠 만도 했을 텐데요.
 
얕은 감상입니다.
 
복도를 걸어갑니다.
 
당신의 방에서부터 복도의 제일 끝 방까지, 걸어갑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당신은 복도 제일 끝 방의 문틈 사이로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관찰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어두워 안쪽은 잘 보이지 않는군요.
 
과연 마왕성이니만큼 크고 넓은 곳, 길게 늘어진 복도들의 방.
 
그러나 당장은 붙잡은 손에 이끌려 걸어갑니다.
 
계단을 조금 더 내려가 성을 벗어납니다.
 
뾰족하게 솟은 탑은 이제 별이 하나 둘 뜨기 시작하는 하늘에 맞닿을 듯, 쏟아지는 별을 맞을 듯, 아득하게 높습니다.
 
헨리 프로스트:(내 처지에 마왕성 산책이라니. 그런 황당함 섞인 잡념과 함께 계속 따라간다...)
 
성채는 검고 단단하게 막혀있습니다.
 
지능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아까 성 안에서 볼 때에는 유리처럼 성의 천장이 투명했잖아요.
 
마치 누군가 안을 들여다보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은 위가 뚫린 상자처럼.
 
어느 순간부턴 발 아래로 사박거리는 모래가 밟혔습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꺼지는 듯 힘없이 모래알갱이가 밟히고,
 
바람이 한 차례 불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달빛 하나에 의지해 잘게 빛나는 수면이 펼쳐집니다.
 
하늘이고 바다고 온통 어둠을 머금어, 달이 없었더라면 그 경계를 가늠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파도 소리는 끝없이 귓가를 메우고,
 
머리칼을 헝클이고 지나가는 바람에선 짠 냄새가 났습니다.
 
당신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습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이곳이 어디인지, 알아? (파도소릴 뚫고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헨리 프로스트:(그토록 작은 목소리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파도 같은 것에 정신팔렸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까. 어둠 속에서 네 얼굴 경계면을 눈길로 쓸며 내리떴던 눈을 들어 똑바로 응시한다.) 바다. …마왕성 뒤의 바다겠죠.
 
젠 마빈 슈트라우스:(몇 차례에 걸쳐 '해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여즉.) 감상을 듣고 싶어... 요. (달빛 닮은 흰 눈동자가 일렁인다. 길게 시선이 맞았다. 긴 적막을 인지하고 나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바다 쪽으로 고갤 돌린다. 마음 가득 담고 있는 미련과 주저하는 원인이 무엇이든, 바다는 모조리 털어버리기 좋은 장소였다.) 어떤 것들이 느껴지고, 그것들로 하여금 무슨 기분이 드는지.
 
헨리 프로스트:(운명이 지어준 영웅이라는 이름 앞, 인류 일대의 적에게 신뢰라던가 정이라던가 준다는 것 자체가 말 안 되는 일이다. 저 위에서 빛나야 할 달빛 모조리 가져오는 눈동자. 무서울 법한 커다란 파도소리도 의연한 척 참아내고 꿋꿋하게 응시한다. 타고난 성격이든 성향이든 여럿 환경이든… 삶이 내어준 ‘헨리 프로스트’만의 요소 전부 뒷전으로 두고 달려왔을만큼 영웅과 의무라는 단어는 무거웠다. 아무튼, 헨리는 언제나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일보다도 내가 죽지 않기를 더욱 바랍니다. (죄 무시하고 전혀 생뚱맞은 대답을 내놓는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 영웅과 의무라는 단어에 떠밀린 '헨리 프로스트', 평화롭던 세상 뒤덮은 재앙이라는 절망, 이 모든 걸 털어내고 원하는 걸 얻어갈 수 있는 곳이...... 바다 마주한 얼굴이 울듯이 웃었다. 뒤편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 일순간 몸을 떨었다.) ......당신은 죽음이 왜 두렵나요, 헨리? (누구나 그렇다는 흔한 답변 말고, 네 신념의 근원을 듣고자.)
 
헨리 프로스트:(얻어갈 수 있는 곳이라 완벽하게 믿는 바보 같은 제국의 충견이라 불릴만하다. 살기 위해서. 마왕을 무찌르고 그 뒤의 삶을 얻어내기 위해. 감수성보단 현실에 가까운 논리가 지배적인 사고 가운데 오직 하나의 희망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허무한 실패라던가,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인간 존재의 인식이라던가 하는 것들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멈췄다가… 일말의 다정 섞인 손길로 등을 토닥이곤 내려놓는다.) …어쩌면… 당신도 그렇게 운명에 휩쓸려 이곳에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꼭 나처럼. (이어지는 말은 뒤늦은 감상.) 바닷바람은 차갑네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결국 그런 앎이 두려움으로 돌아오는 거네요. 겪어본 적이 있나 봐요... (안타깝게도. 허나 바보 같은 제국의 충견이라 불리면서도, 증명된 적 없는 희망에 기대어서라도 결코 체념 한 자리에 붙박이지 않는 것이 당신이다. 나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회복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는 대단한 의지다. 토닥이는 손길이 스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앞으로 주춤 휘청인다.) ...... (놀라움으로 크게 뜨인 눈이 네 쪽을 바라봤다. 그 채로 응시하며 한숨처럼 웃더니 이내 물가에 손을 뻗는다. 밀려오는 파도에 손 끝이 찰박이며 젖는다.) 여, 영 춥다면 들어가도 좋아요. 나는 익숙하지만, 당신은 몸도 안 좋고... 감기에 걸린 채 이루는 마지막 승부라니 영 모양새가 별로잖아요.
 
헨리 프로스트:가장 오래된 기억속의 날부터 줄곧 해왔던 생각이니까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털어놓을 이야기는 아니니까. 선 긋듯 눈 가늘게 뜬채 대답하다 놀라는 얼굴에 의아한 기색 내비친다. 중심 잃은 몸 붙들어 바로 세웠다.) 이런 걸 바라던 게 아니었나. (움직임 따라 바다로 시선 돌린다.) 됐습니다. 추억이 필요하다면서요. (작은 정원 꽃이나 바다를 벗삼아 살아온 건가. 젠이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마왕으로 세상에 태어나 여지껏 홀로 외로이 존재했다면, 그것도 참 가혹한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해야할 일이 있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그래서도 안 되는데 자꾸만 그리로 감정이 치우친다.) 당신은…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내내 혼자였어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 고민과 기억이 영영 없었더라면 우리의 대치가 조금은 원만했을까요. (물에 닿은 손이 냉랭한 공기에 휩싸여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이 빨갛게 물든다. 흘끗거리며 눈칠 보다가 몇 걸음 더 바다로 향한다. 새카만 물 밑을 응시하며 작게 내뱉는다.) 당신이 친절한 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다가와 줄 때마다 놀라워요. (세찬 물결이 신을 적시고, 다리에 부딪히고, 허공에 튀는 것은 포말이다. 수면이 짧게나마 잠잠해지면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아주 혼자는 아니었어요. 당신에 대해 이야기 해준 이가 곁에 함께할 때도 있었고, 그보다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갈 때도 있었죠. 나는 바다를 보는 내내 연민을 느껴요. 나와 다, 닮았거든요...... (찬 숨을 내쉬었다.)
 
헨리 프로스트:그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나를 이루는, 내 것을 잃는 건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여전히 있던 자리에 서서 그 모습 지켜본다. 작은 숨.) 그런 것들 하나 없이도 여전히 나는 헨리 프로스트라서요. 아마 지금과 같을겁니다. (온갖 하얗고 맑은 것들을 연상시키는 눈동자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 시야를 뒤져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수면 위 수놓는 어스름한 달빛과 당신의 인영이다. 파도가 물 헤집는 모습을 듣는다. 고작 밤바다 쳐다보는 일로-생경한 바다 울음소리 듣는 것은 너를 죽이고 돌아간다면 언제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희망-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란 걸 다시금 상기한 것은 시야 가득 들어찬 풍경이 당신의 말과 함께, 퍽 애달피 다가오는 까닭이다.) 매번이라니,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가 나오는 꿈이라도 꿨나봅니다. 그곳에서 나는 당신의 친구였나보죠. 결국 마주하는 날엔 당신이 바라는대로 될 수 없단 걸 알았잖아요. (한쪽 입꼬리 올려 웃는다.) 내가 보기에도 닮았어요. 이를테면 냄새 같은 거. (뒤통수 뜯어보며 그간 네 모습을 떠올리다 느리게 잇는다.) …발치로 불규칙하게 밀려오는 파도라던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걷는다.) 연민을 느낄 정돈 아니던데. 젠, 불우한가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 (오랫동안 대꾸는 없고, 대화 사이를 채우는 공백만 길다. 파도 소리와 함께 쓸려 허공으로 흩어지는 건 어둠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 그걸 무마하기 위해 흐리게 웃는 음성, 손길 닿아 거세게 첨벙이는 물결 소리 정도다. 왼 손으로 어깨에 걸친 망토를 당겨 얼굴에 부비고 닦아낸다. 고갤 들어 발 아래와 다를 것 없이 칠흑 같은 하늘을 보면, 몸집을 부풀린 자연에 먹혀 가라앉는 기분마저 들고 만다. 숨이 가쁘다.) ......불우하네요, 많이. (한밤 중, 기어코 거리를 두고 뒤돌아 선 채로도, 울음에 먹혀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헨리 프로스트:(기어코 바다와 함께 울음소리 섞여오면 혀내어 마른 입술 축인다. 어색한 웃음 흘린들 그곳에도 슬픔 덕지덕지 묻어서 가려질리 없다고 말해줘야하나.) ……당신 마음을 찌르려 건넨 말은 아니었는데. 그렇잖아요,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매번 친절하게 굴었다던 사람은 상상속의 헨리 프로스트인걸요. 우리는 애시당초 서로의 적이라 정해진 채 세상에 났어요. 그게 그렇게 불우하다며 울 일인가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던 시절이랬나…, 그런 그리움에 사무친 탓에 외로워서 그래요? (그러나 너는 무엇도 말해주지 않아 속단하며 몇 발 더 걷는다. 이 순간 무슨 생각으로 바다 가까이 발을 딛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당신을 죽이러온 사람에게까지 울고불며 처지를 하소연할만큼. …그리도 외로웠어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나도 알아요......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하는 사실인데. 파랑처럼 일렁이는 감정에 눈 뒤편이 새빨개지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신체적인 반응은 저주스러울 지경이다.) 전부 당신 말대로예요. 틀린 것 하나 없어요. ......우리는 처음 만났고, 서로의 적이라 정해진 채 세상에 났으며, 내일이면 모든 것의 끝이 나겠죠. (무어라 덧붙이려다 멈추고, 가만 입꼬리만 끌어 올린다.) 외롭지 않다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실은 사무치게 외로웠나 봐요. (갈비뼈가 부러질 듯 가슴이 죄어왔다. 숨을 고르고 있자니 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느릿하게 몸을 반 쯤 틀어 네 쪽을 본다.) 있잖아요, 헨리. 용사로 태어나 마왕을 만나게 된 소감은 어때요?
 
헨리 프로스트:(엎어지면 닿을 거리가 되었는데도, 바다에 발끝 담그길 망설이다 도로 한 발 뒤로 걸음을 물렀다. 이대로 조금이라도 더 마음 내어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잘 아는군요. 그러니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야속해 말아요. 당신 외로움이나 슬픔은 알 필요가 없었거든요. (돌아보는 표정으로부터 쏟아져 시신경으로, 감정으로 밀려든다. 하얀 파도가. 물결이 네 다리에 부딪히던 것처럼, 불안하게 선 벽에 포말이라도 만들어냈을까. 그래야만한다. 시선 굴리며 네 눈빛 보지 않으려 애쓴다.) …소감이라니. (하하 마른 웃음소리 낸다.) 상상해왔던 장면과는 많이 달라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 그런 이름 같은 거 알게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럼에도 극은 종장에 다다르고 있다는 게 실감나고요. …아, 말했던가요? (설마. 그런 말은 일체 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어쩐지 알고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연극 좋아하거든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그럼 한참을 애처롭게 바라만 보다, 체념한 듯 다시금 앞을 향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막막하다.) 감히 그런 마음 갖지 않아요. 당신은 세, 세상을 구하는 쪽 답게 행동해야 할 테니까요. 애매하게 구는 건 나로 족하니...... (이것도 내일, 결전의 날이 되면 손바닥 뒤집듯 바뀔 태도이기는 하나. 별다른 대꾸는 않았으나 또한 반문치 않는 걸로 보아 극에 대한 점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상대로,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특히나 세상이 온통 당신을 선역의 주인공으로 주목하니 만족스럽겠어요. (코를 훌쩍인다. 눈 내릴 수준의 강한 추위 때문이었을 테다. 멍한 눈으로 저 멀리, 저 머나먼 곳을 응시한다.) 용사, 슬슬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곧 추억이 될 기억, 내 욕심을 채우는 건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아요. 또, 사려 깊게 남아 주었지만 실은 피곤할 테고. ...이대로라면 나만 더욱 비참한 꼴이 될 것처럼 보여서.
 
헨리 프로스트:…다행이네요. (다시 한 발 뒤로 무른다.) 네, 이대로 당신을 죽이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세상이 찾아올 수 있을지 궁금할만큼요. (과장된 목소리는 반쯤 거짓이다. 멍한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가 곧 들려오는 말에 눈 끔뻑인다. 으쓱이며 바지주머니에 두 손 쑤셔넣었다.) …이제 나 혼자 돌아가나요? (죽기 전 마지막 추억이라. 그저 싸우다 죽어버리는 것보다야 인상적인 서사는 되겠네. 크게 밀려온 파도가 발에 못 미치고 모래로, 있던 자리로 스며들고 돌아가며 부서진다. 도로 무감한 얼굴 하고선 잠시 바다의 잔해를 눈에 담다가 뒷걸음질로 몇 발 물러나고 돌아 걷는다.)
 
그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 순간에 당신이 피로할 수 있다는 것도,
 
돌아갈 방이 있다는 것도,
 
마왕이라는 자와 정당한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것조차.
 
당신은 휘적휘적 방으로 향합니다.
 
침대에 다시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마왕의 소굴에서 편안하게 잠이 드는 용사라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마왕이 이상하게도 친숙한, 그러니까 꼭…….
 
황성의 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그들과 똑같은 사람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이 차오릅니다.
 
……아뇨,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런 건 있을 수 없어요.
 
마왕이 저런 사람이라면, 저토록 인간적이라면,
 
그리하여 당신 기준 '마왕'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저 먼 길을 한 명의 살인자가 되기 위해 온 셈입니다.
 
헨리 프로스트:(그러나 짐작만으로 속단하여 일을 그르칠 순 없는 노릇이다. 태어나 지금껏 평생의 시간을 걸어온 과업이기에 더욱 그랬다. 애초부터 그가 자신을 마왕이라 소개하였으니, 감상에 젖을 힘마저 쏟아부어 그를 죽여야만한다.)
 
마왕, 그리고 용사.
 
당신은 그를 죽여야만 합니다.
 
당신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몰아치는 상념 속에 눈을 감습니다.
 
......
 
잠이 든 혼곤한 몽중은 온통 깜깜합니다.
 
별빛조차 없는 밤에 당신은 오롯이 혼자입니다.
 
소리, 무언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네요.
 
알고 있는 장면입니다.
 
꼭 이런 날이 아니더라도 숱하게 꿔 온 꿈이잖아요.
 
무언가 당신을 짓뭉개고 있습니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뒤집힌 마차와 마차를 덮은 눈들.
 
새하얀 악몽.
 
힘이 빠집니다.
 
뒤집힌 마차 깔린 다리 흩날리는 눈발 대자연 날 것의 위협 속에서…....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는…....
 
마왕을 물리치셔야 해요.
 
이 제국의 자랑스런 용사여.
 
마왕을!
 
재앙의 근원이 되는 그를!
 
용사님!
 
용사님, 당신은 운명을, 운명을 지고 태어났잖아요.
 
당신은 용사는 제국은 당신은 마왕은 세계는 재앙은 운명은 당신은…….
 
숨을 들이킵니다.
 
눈을 뜨면 아직 푸르게 어두운 하늘이 창밖에 펼쳐진 밤입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흐릅니다.
 
의무 같은 모든 것들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된단 말입니까?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지금껏 살아왔는데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재앙 따위에 순순히 스러지겠답니까.
 
그럼에도 불안이 몰려옵니다.
 
두려움이 온 몸을 잠식합니다.
 
당장 그를 죽여야 한다는 광기에 가까운 강박이 발밑까지 차들어옵니다.
 
결국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등잔을 들고서 방을 나섭니다.
 
빛이 가득히 일렁였던 천장은 별빛조차 투과해내지 못하고 검습니다.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치 암흑으로 뒤덮인 성 안.
 
홀에 피어있던 꽃향내는 기이한 마법 같고, 어슴푸레한 등불에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며 당신은 조심조심 복도를 걷습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아주 느리게……
 
"……서."
 
목소리입니다.
 
흠칫 멈춰섭니다.
 
누구일까요?
 
젠이 떠올랐으나, 이 넓은 마왕성에 정말 젠 혼자 뿐일까요?
 
당신은 기척을 죽이고 어두운 복도를 더듬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나섭니다.
 
아, 저 방입니다.
 
복도의 맨 끝에 있는 저 방입니다.
 
문틈으로 촛불처럼 가녀린 빛이 비칩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빛줄기를 따라 문에 바짝 붙어서면,
 
"……소서."
 
젠입니다.
 
헨리, 듣기 판정이 가능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듣기
기준치: 40/20/8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무언가를 처절하게 빌고 있는 모습.
 
옹송그린 등에 발음이 묻혀 먹먹합니다.
 
왜, 문장 끝이, 젖어 있나요?
 
젠이 일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듭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신자가 아니라 제물처럼 초라하게 기도하며 꿇었던 무릎을 펴며 비틀거립니다.
 
돌아섭니다.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
 
시야가 한정적입니다.
 
은밀행동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
은밀행동
기준치: 30/15/6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열린 틈으로 당신은 방 안으로 들어섭니다.
 
인기척 없이, 돌아선 젠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리고 등잔을 들어 방 안을 보면,
 
자세히 볼 필요도 없습니다.
 
'제발', '죽어', '죽여줘', '살고 싶어', '죽고 싶어'.
 
……시커멓게 굳은 피입니다.
 
벽에 피로 온통 낙서가 되어 있습니다.
 
미치광이가 칠갑을 해 놓은 듯한 이 방에서 젠은 무얼 기도하고 있던 걸까요.
 
인간의 피.
 
어두운 방.
 
그의 그림자를 다시 봅니다.
 
마왕.
 
헨리, 이성 판정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습니다.
 
나아가려 했던, 혹은 물러서려 했던 당신의 발에 무언가 툭 걸립니다.
 
그 소리에 젠이 섬뜩한 속도로 돌아봅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헨리.
 
발밑을 보면 작은 수첩 하나가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든 등잔 아래가 어두워 젠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떡할까요?
 
헨리 프로스트:……. (수첩 발로 차서 문밖으로 밀어낸다.)
 
젠은 돌아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당신을 응시합니다.
 
그와 마주한 지 처음으로,
 
생경하게도,
 
새삼스럽게도,
 
두려움이 치솟습니다.
 
정말로,
 
그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혹은?
 
젠 마빈 슈트라우스:......잠들지 않고, 왜. (흔들리는 등불 탓인지, 바라보는 시선이 불안정하다.)
 
헨리 프로스트:(의미 모를 두려움이 타고 올라도 시선 떼지 않고 응시한다. 언제나 뻔뻔한 태도가 시그니처였으니까.) 잠자리가 낯설어서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답잖게 이죽인다. 그 웃음에 무슨 감정이 담겼는지는 본인조차 자각치 못했지만.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게 창문은 잘 잠가 두었는데... 자, 자장가라도 불러 달라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요.
 
헨리 프로스트:(그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하다가) 잠 안 오면 멋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죠. 당장 죽이겠단 것도 아닌데 뭘하든 내 마음 아닌가. (별 쓸 데 없는 배려를… 헛웃음 흘리곤 눈 느리게 감았다 떴다.) 문이 열려있던데, 기도 빙자한 기행 들키기 싫었담 단속을 잘했어야죠. (고개 까딱인다.) …아무튼, 방해는 이쯤하고 가보겠습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곧 해가 뜰 거예요. 모든 결말은 그 때 날 테니, 그 전까진 홀로 푹 쉬어 두는 편이 좋겠죠. 당신 방 안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내리 누르듯 말한다. 등불의 빛만이 아른거리는 성 안, 셀 수 없이 많은 감정 얽힌 음성을 잇다 고개를 돌린다. 시선의 방향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정적. 네가 나가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걸음을 붙잡는다.) 헨리, 용사. 나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나를, ...... 용서해요.
 
헨리 프로스트:(시선만 힐끗 주었다가 별 대꾸도 없이 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수첩 챙겨들어 먼지 털어낸다. 그리고 불규칙한 걸음 이끌어 걷는다.) …세상에 존재할 사연이라곤 다 갖다 짊어진 사람처럼 굴긴.
 
……지금 당신, 무슨 마음인가요?
 
당신은 방으로 돌아옵니다.
 
새벽은 아스라이 밝아지려 하는데.
 
등잔의 불은 여전히 미약하기만 합니다.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적은 기분입니다.
 
옹송그린 등, 보통의 사람, 마왕과 용사.
 
헨리, 지능 판정을 할 수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문득 의문점이 밀려옵니다.
 
왜 세상의 끝이 이곳이라고 규정되었지.
 
마물들이 한 번이라도 여타 제국의 사람들을 공격한 적이 있나?
 
마물로 인한 실제 피해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나?
 
마왕은 꼭 나를 아는 것 같았다.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용사는 나 하나뿐이었나?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태어났다면, 마왕은?
 
수첩을 쥡니다.
 
등불에 비춰봅니다.
 
아주 오래된 종이냄새.
 
이 안의 내용을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헨리 프로스트:(침대에 걸터앉아 등잔불 앞에 대고 수첩을 펼친다.)
 
이미지
 
왜 나와 네가 선택되었는지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운이 없어서라고.
 
…….
 
이곳은 외롭지만 견딜만 해.
 
그러니까 너는 그곳에서 나를 보러 와, 나를 만나러 와.
 
기다릴 수 있어.
 
…….
 
부러워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부러워하게 돼.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아.
 
점점 잊어가는 게 많아져.
 
언젠가 내게 소중한 것마저 떠나보내면 어쩌지?
 
…….
 
한 사람은 죽여 재앙이 되고 한 사람은 죽어 용사로 태어난다.
 
용사는 잊고, 나만, 기억한다.
 
그래서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이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 해도,
 
이게 세상이 바라는 전부라고 해도,
 
가끔은 버거워.
 
죽이고 싶지 않아.
 
죽이고 싶지 않아.
 
끔찍해.
 
그러나, 그렇지만,
 
…….
 
나 네가 불쌍해.
 
나 내가 불쌍해.
 
…….
 
헨리.
 
이건,
 
…….
 
이미지
 
누군가가 당신의 손아귀에서 수첩을 채갑니다.
 
누구인지 살펴보지 않아도 좋겠지요.
 
단 둘 뿐이니까요.
 
헨리, 이성 판정합니다.
 
헨리 프로스트: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1 감소합니다.
 
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습니다.
 
반대로 무언가로 꽉 차 버린 것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도구.
 
용사와 마왕이라 이름 붙여진 연극의 배우.
 
결코 무대 밖으로 내려갈 수 없는 인형극.
 
옛날 옛날에, 난세의 아이라고 불리던 어떤 용사가 있었습니다.
 
용사의 사명은 재앙의 근원을 무찌르는 것이었고,
 
그 용사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들면 동이 터오고 있습니다.
 
햇빛이 눈부시고, 찬연하게 비쳐오는 빛줄기를 따라서 시선 또한 따라갑니다.
 
그 눈길 끝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 서 있습니다.
 
그가 어느덧 검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떨고 있습니다.
 
헨리 프로스트:……내가 당신을 죽여 얻는 게 재앙의 소멸이 아닌 고작 마왕성의 빈자리라고. (화난 얼굴로 눈만 치켜뜬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피를 토하듯 멈추었던 숨을 내뱉는다.) 미, 미안해, 헨리. ...미안해요. (거짓이라도 읊어주고 싶지만 지금에서 무마하기엔 이미 코 앞까지 다가온 진실이 방 안 가득 패악질 치고 있어서. 검을 고쳐 잡았다. 허나 떨리는 손 끝은 여전하다.)
 
헨리 프로스트:……미안하다고? (분에 못이겨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 씨. 그래서 당신은 영원토록 이러고 살 작정이야? (그리 말하며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노려보는 시선에 바들거리다 붙잡고 있는 손에 조금 힘을 풀면, 검날의 끝이 바닥에 닿는다. 그것이 직직 끌리는 소리가 걸음 소리와 겹쳐졌다. 마찬가지로 창문께로 향한다.) 네가 그만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절망에 먹힌 표정으로, 영영 악몽에 갇히는 꼴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으니까...... 내가, 하, 할 수 있는 일은 이 뿐이었어. 남은 것이 영원이래도 나는 할 수 있어. 네가 내게 남겨준 것들이 있으니까...... 버티는 일은 어렵지 않아. (어떤 불길함처럼 맥박이 얕게 뛰었다. 눈썹이 축 처진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까딱인다.) 그러니 죽어 줄래요, 내 손에.
 
헨리 프로스트:전부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기억도 나질 않지만, 내가 설령 그런 말을 했대도 이런 방식은 원치 않았을 텐데, 사실 알고있었죠? (창가에 도달하면 바다를 등지고 마주본다.) 이 편이 나을 거라고? 착각도 정도가 있지. 한쪽은 모든 상황을 짊어지며 희생하고 나는 끊임없이 망각하여 이 따위 질 낮은 연극에 놀아나고…. 나 참, 웃기지도 않는군. (그렇다면 또 다음 번이 있다는 뜻인가. 죽음 앞둔 상황에서 불안은 제쳐두고 몸 돌려 창 너머 바다를 본다. 찰나, 마침내 해가 뜬다.) …당신, 세상의 재앙은 못되어도 나에겐 분명한 재앙이군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찾은 방법이 이것 뿐이었어요. 간곡히, 기도한 끝에 찾은 해결책이...... (피로 범벅이 된 기도실에서 매일 밤을, 네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비린 향을 들이키며 몇날 며칠을, 홀로. 간곡한 바람이 실체가 된 것은 이번 생이 처음이기에, 기억을 잃은 네가 찾아와 저를 마주하는 것 역시 이번이 최초다.) 실제로 어제의 재회는 몇 번의 해후보다 담담했고, 거쳐온 시간의 무게에서 벗어나니 지금 나를 온전히 원망하고 분노할 수 있잖아요... (어둡던 세상에 빛이 깔리고, 넓게 펼쳐진 수면이 햇살로 반짝인다. 광원을 등지고 선 너를, 마주한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린다. 용사, 제국, 축복 받고, 신의 가호 속에 출정하는 삶. 그 찬란한 곳은 나보다 네게 더 잘 어울린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이 질리도록 반복되는 극에 불과하더라도.) ...내, 내 최선은 항상 남에게 닿으면 최악이 되곤 해요. (숨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헨리 프로스트:(손을 쥐었다 폈다.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하나 가늠하듯. 그러나 제정신 아닌듯한 방과 그간의 말들로 하여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이성을 앞세워 진정한다.) 그게 진정 사실이라면, (숨을 쉰다.) 재앙이고 세상이고, 이제 와서 알 게 뭐야. ……희생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더라? 치언이지.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잖아. (겁도 없이 다가가 붙잡고 창가로 끌어온다. 창의 녹슨 연결고리에서 불쾌한 소음이 인다. 겨울의 바닷바람이 새어들어오고, 창 바깥으로 단단히 붙든 두 몸체를 끌어 기울인다. 불안정한 숨 귓가에 스칠 때마다 짜증 섞인 웃음이 샌다.) 난 도저히 납득 못하겠으니까. 이미 멍청하게 헛짓거리 한 거 다 들켜버린 이상 어쩔 수 없겠네. 선택해, 젠 마빈 슈트라우스 씨. 날 죽일 거라면 당신도 같이 죽고, 살 거라면 같이 살아. 악연이든 인연이든, 운명으로 묶인 이상… 다른 것은 멸망하든지 안중에 두지 말고 서로만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영원을 살아가자고.
 
젠 마빈 슈트라우스:(붙잡고 이끌면 그 채로 힘 없이 걸어나간다.) ...... (본래 택하려던 건 둘 중 하나가 죽음에 닿는 일, 다만 네 선언으로 인해 선택지가 완전히 뒤집힌다. 그가 아무리 세계를 사랑하더라도, 운명이 희생을 강요하더라도, 당장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그리 읊는데, 어찌 검을 계속 쥘 수 있겠는가. 축축한 손은 기어코 길다란 것을 놓치고 만다. 텅그렁. 발 언저리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러나 시선은 아주 가까이 맞닿은 네게로 향한다. 심기불편한 웃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고도 떨리는 호흡을 잠재우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울음과 닮아 짠 바닷바람이, 찬 공기에 휩싸여 방 안으로 들어온다. 버석거리는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린다. 기나긴 수평선처럼 한참 잠잠하다.) ......나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나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헨리 프로스트:웃기는 소리. 네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이 이상 내 걸 빼앗기는 건 절대 용납 못하기 때문이거든. 내 목숨이든, 삶이든, 기억이든. (쇳덩어리가 바닥에 나뒹굴면 뒤로 재낀 채 버티던 무게가 그나마 가벼워진다. 기울였던 몸 바로하고 웃으며 꽉 붙들어 안는다.) 그리고 당신이든. (강하게 붙들던 힘을 풀고 가깝던 시선 지나쳐 가볍게 끌어안는다. 머리부터 등까지 느릿하게 토닥인다. 바다는 저 멀리 자리를 지키고있고, 마주한 곳은 뭍이니. 심지어는 달 아닌 아침의 해가 환하게 비추고있다. 그런 연유로 찡그림 속 축축한 시선이나 짠내나는 목소리, 기죽고 운명에 억눌려 찌질한 행동거지 등을 확실하게 눈으로 살피며, 드디어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성정에 다정함 품고있었으니 이런 상황이래도 달래듯 구는 게 예삿일은 아니다.) 내가 알고있던대로 재앙을 불러온 절대악이자 마왕인 당신이었다면 싫어했음에 틀림이 없겠지. 하지만 운명이 순진하고 불쌍한 우리 두 사람을 두고 용사와 마왕이라 부르길 반복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 싫어해본 적 없는 내가, 심지어 나를 싫어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품에서 떼어낸다. 바닥의 검 대충 걷어차 침대 밑으로 집어넣는다.) 아는 게 없어 불만입니까? 앞으로는 영원이니 주어진 시간도 많고 내 앞에 당신 소개해줄 사람도 있겠다, 문제 없다고 보는데…….
 
젠 마빈 슈트라우스:(얼마나 오래 보았다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하루 동안 제가 내내 어떤 꼴을 보였는데. 위로 담아 토닥이는 손길이 닿으면 미약하게나마 웃었다. 누군가에게 안긴 것이 얼마나 오래 된 일이더라.) 불만이라기엔 오히려 너, 너무 과분해서...... (세계의 존속을 위한 과업이니, 너를 위해 다짐한 고결한 희생이니 하는 것들이 벗겨지고 나면 들어차는 감정은 완전히 생소한 결을 가진다. 한 차례 삶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사무친 외로움은 온기와 맞닿아 의존과 사랑으로 변모한다. 머릿속 겹쳐진 기억의 두께가 남다르듯, 심장이 무겁게 뛴다......)
(언제고 나를 움직이고, 나아가게 하는 너. 어두운 밤바다에도 시간이 흐르면 햇빛이 내리쬐듯. 견디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만든다.)
 
떨어트린 검은 저 멀리 시야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짧은 평생을 숱하게 무너지지 않게 세웠던 맹세는 저 검과 함께 바닥까지 추락하고 없습니다.
 
마왕도, 용사도 우리에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담한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요?
 
도대체 왜, 우리가 왜 죽어야 하나요.
 
동이 틉니다.
 
아침은 속절없이 밝아오고, 하늘은 속도 모르고 환합니다.
 
그 빛나는 하늘을 받들듯 서서, 당신의 모습만을 눈에 담습니다.
 
눈꺼풀 안쪽에 화상처럼 남깁니다.
 
내 이 생 안에 머물 상처여.
 
생각해보면 당신과 나는 정해진 결말이라는 게 없었는데.
 
둘 중 하나를 살해해도 끝나지 않는 영원이라면 다 팽개칠 텝니다.
 
전부 버려버릴 겁니다.
 
이 생애가 끝날 때까지 버티면 되는 걸요.
 
토해내는 숨이 묵직합니다.
 
젠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어보이고.
 
젠 마빈 슈트라우스:......하지만 언젠가 네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어.
 
이렇게 살아, 나와 같이, 나와 함께…….
 
세계의 평화도 사람들의 행복도 우리의 영겁의 고통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수많은 생들이 우스웠던가요?
 
왜 우리는 이기적이면 안 되는 건가요.
 
젠 마빈 슈트라우스:헨리.
 
……문득 웅크려 기도하던 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참혹 속에서 홀로 초라하게 손을 맞잡고 있던 당신.
 
여태 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나요.
 
웃고 싶은 기분입니다.
 
왈칵 바보처럼 웃어버리고픈 기분입니다.
 
젠 마빈 슈트라우스:내, 내 곁에 있어줘…..
(호흡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날 버리지 말아 줘. 뭐든, 네가 바라는 대로 할 테니까…...
 
Happily, ever, after.
 
현실에는 없는 결말을 행복하게Happily, 그 하나만 남겨 놓고서라도 지워냅니다.
 
영원이 고통이고 닥쳐오는 것이 수많은 죽음이라 한들 지금은 살아있을 테잖아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처음, 서툴게 도망칩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목숨이여, 나아가 세계여,
 
부디 용서하소서.
 
■■의 이름으로 당신도, 나도.
 
세상은 언제까지 평화로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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